한국의 문화유산 몇 가지를 간략 요약
- 최초 등록일
- 2007.10.11
- 최종 저작일
- 2007.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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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많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목차
고인돌
고려대장경
다산 정약용
성덕대왕 신종
화성
미륵반가 사유상
금속활자
문집의 이해
향교와 서원
등..
본문내용
성덕대왕 신종
성덕대왕 신종은 봉덕사종, 에밀레 종이라고도 불리며 만들어진 시기는 통일 신라에 만들어졌다. 신종은 국보 29호로 종의 기원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대강 중국초 은나라 하남청에서 비롯된 것으로 추적된다. 성덕대왕 신종의 구성요소를 살펴보면 무게 18.9t 하부구폭 222.7Cm ,높이366Cm로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대종이다. 용뉴는 종을 달기 위한 시설물로 중국과 일본은 쌍용이나 한국은 단용이다. 비천상은 하늘로 날아가는 신인과 조화를 이루며 힘차고 기백있고 섬세하다는 특징이 있다. 이 두가지는 세기의 걸작품으로 알려져 있다. 음통은 큰 피리모양의 원통으로 신라종만의 독특한 특색이다. 또 종에는 유곽이 4개 있는데 소에 설치되었으며 각각 9개의 씨가 있으며 경계는 연주무늬이고 내부는 9개의 유가 있다. 비천상은 신라미의 대표이며 당화는 타격의 부위로 2군데 있다. 종 전체의 조형미를 살펴보면 곡선미, 조각의 조형미가 뛰어나며 종소리는 맑고 고, 저음이 잘 배합되었으며 멕놀이 현상으로 소리가 다시 살아나 여음이 긴것이 특징이다.
화성
화성은 조선 후기 영정조시대 문화 부흥기에 조선 최대의 역량이라고 하겠다. 우선 행궁을 중심으로 세워졌으며 치수 작업이 이루어졌으며 <화성 성역 의궤> 라는 화성을 만드는 과정을 설계도로 작성하였다. 설계도를 보면 성곽모양이 나뭇잎 모양으로 되어있다. 그리고 화성은 정조 18년에서부터 정조 20년까지 28개월동안 완성되었다. 이렇게 짧은 기간안에 축조가 가능했던 것은 정조의 장기적인 구상과 노동자에 임금을 지급하여 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를 유도했기 때문이다. 화성 거중기를 사용하였으며 분업 체제가 이루어졌다. 또한 화성은 규장각에서 연구한 북학파의 신지식으로 축조했으며 유성룡, 유형원을 비롯한 지식인들에 의해 전통 축성술이 사용되었다. 축조 배경을 살펴보면 정조는 아버지를 격상시키기 위해서 또 영정조시대 한양 팽창으로 새로운 도시가 필요하였다. 정조는 유수부체제로 친위부대인 장용역을 두고 규장각을 설치하여 문서작성, 사고전서를 하는데 세웠다. <화성 성역 의궤>라는 책을 살펴보면 완벽한 공사 보고서로 후대에 배려하여 쓰여졌으며 문화적 자신감을 보여준다.
미륵반가 사유상
우리나라의 반가 사유상은 6C후에 유행하였는데 나라가 혼란할때 미륵신앙이라 하여 내세불이 유행하다가 아미타 신앙인 현세불로 옮겨졌다. 이 당시 정토신앙으로 유명한 스님은 원효가 대표적이다. 백제시대 때 서산 마애 삼존 불상이 통일시대이전에 유행하였다. 미륵신앙과 관련하여 신라 때 김유신의 화랑도는 `용화향도`라 하여 미륵신앙과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미륵신앙은 중국에서 6C에 소멸되었으며 한국은 7C전반까지 존재하다가 그 이후 아미타불 민중신앙이 유행하였다. 두 국보(78호와 83호)인 반가 사유상을 살펴보면 우선 국보 78호인 금동미륵 반가사유상은 일월식 삼관상 사유상이라 불리며 엄숙한 구도자의 사색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치마의 주름은 양감적이며 윤곽선의 흐름을 강조하였고 견고한 느낌을 준다. 사유상의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