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이지 유신과 사카모토 료마에 대해서
- 최초 등록일
- 2007.09.02
- 최종 저작일
- 20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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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일본사회와문화란 주제에 대한 리포트
목차
1. 사카모토 료마
◎사카모토 료마와 도사번, 북진일도류
2. 그 당시 시대의 흐름과 주요 사건․인물
◎페리의 내항에서 대정봉환과 무력에 의한 왕정복고까지
3. 사카모토 료마의 죽음과 영향
본문내용
1.사카모토 료마 [坂本龍馬] (1835~1867)
◎사카모토 료마의 생애
1835년 11월 15일 지금의 시코쿠[四國] 남부 고치현[高知縣]에 해당하는 도사번[土佐藩]에서 향사(鄕士)의 아들로 태어났다. 1853년 에도[江戶]로 가서 지바[千葉] 데이키치[貞吉]의 호쿠신잇토류[北辰一刀流] 도장에서 검술을 익히면서 왕권 복구와 서양 척결을 주장하는 존왕양이(尊王攘夷) 주의자들과 교류하였다.
페리의 내항으로 인해 에도가 소란할 때 느낀 바가 있어 고향으로 돌아가 1861년에는 다케치의 토사근황당에 참가한 후, 이듬해 친(親)서양파인 가쓰 가이슈[勝海舟]를 죽이기 위해 다시 에도로 갔다. 그러나 오히려 가이슈의 설득에 감명을 받고, 이때부터 가이슈의 제자가 되었다.
그는 무력봉기 계획보다 “시대를 바꾸는 것은 해운이고 해군이다”는 신념을 갖고 있었다. 1865년 나가사키에서 해운업을 일으켜 ‘가메야마샤츄[龜山社中]’라는 회사를 조직하고 무역상사 겸 사설 해군으로 활동한다. 그리고 다시 도사번의 실권자 고토 쇼지로에 접근하여 탈번의 죄를 용서받고 카메야마사츄를 번 소속으로 하여 가이엔타이[海援隊]로 개명했다.
1866년에는 서로 대립 관계에 있던 사쓰마번[薩摩藩]과 조슈번[長州藩]의 동맹을 성사시켜 도쿠가와막부[德川幕府]를 무너뜨릴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듬해인 1867년에는 도사번주인 야마노우치를 움직여 쇼군에게 권고토록 한 바, 막부와 번을 통일시켜 에도막부가 천황에게 국가 통치권을 돌려준 역사적인 사건 대정봉환(大政奉還)의 구상을 성사시켰다.
이 사건으로 일본은 가마쿠라막부[鎌倉幕府] 이래 675년 동안 계속되던 봉건시대가 끝나고, 메이지유신[明治維新]을 통해 중앙집권적인 근대국가로 나아갈 수 있는 발판을 마련하였다. 1867년 11월 15일 친구인 나카오카 신타로[中岡愼太郞]와 함께 습격을 받아 교토에서 33살의 나이로 암살되었다.
참고 자료
김동진, 『일본 근대사』, 한길사, 1985
박경희,『연표와 사진으로 보는 일본사』, 일빛, 1998
강창일·하종문 ,『연표와 사진으로 보는 일본사』가람기획, 1998
山本 大,『坂本竜馬 知れば知るほど』実業之日本社,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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