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역사스페셜
- 최초 등록일
- 2007.05.04
- 최종 저작일
- 2006.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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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kbs역사 스페셜 “동학군 수괴 유골,왜 일본에서 발견되었나”편을 본 후 쓴 비평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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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지난 1995년 일본에서 발견된 유골을 소개하면서 방송은 시작되었다. 유골에는 “동학당 수괴” 라는 일본어가 쓰여져 있었고 동학농민군과 일본군과의 관계의 실상에 대해서 살펴보기 시작했다. 유골은 일본의 최북단의 한 대학의 교수실 책장에 허름하기 짝이 없는 상태로 방치되어 있었다. 6개의 유골이 과일처럼 상자에 포장되어 있었다. 이 인골은 당시 일선공조론을 증명, 연구하고자 이 대학까지 온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동학농민운동은 크게 2차례 봉기하였는데 1차와는 달리 일본군의 경복궁 습격사건으로 인해 전국적으로 일어난 2차 봉기 사건으로 인해 일본군과 동학농민군의 본격적인 교전이 일어나게 되었다. 하지만 농민군은 정교한 훈련과 최신 무기를 갖춘 일본군과 달리 훈련 상태와 무기의 열악함으로 인해 일본군과의 교전에서 이렇다 할 승리를 거두지 못하고 계속 밀리기만 했다. 당시 60여만명인 동학농민군과 일본군 2000명이라는 숫적 우위에도 불구 하고 말이다. 일본군은 이렇게 동학농민군을 아래로 아래로 몰아 결국 강진, 장흥까지 몰아세웠으며 최후의 격전지인 진도까지 가서 동학농민군을 몰살하게 된다. 최후의 격전지인 진도에서는 수많은 유골이 묻히게 되었고 수많은 유골중에서 동학군의 지도자인 “박중진”(추정) 의 유골을 수집해 일본으로 가져가게 된 것이다. 이 유골은 동학농민군의 아픔을 간직하고말없이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다. 이러한 동학농민군의 학살은 당시 일본군의 제국주의적 성격과 무고한 생명을 앗아간 몰살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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