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표상으로서의 광개토왕비문
- 최초 등록일
- 2007.04.27
- 최종 저작일
- 2007.03
- 4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4,000원
소개글
광개토왕대왕비에 기록된 비석에 대한 해석.
목차
서론
본론
광개토왕비의 외형과 비문의 내용
근대 일본과 한국의 텍스트로서의 비문
-근대 일본의 텍스트로서의 비문
-근대 한국의 텍스트로서의 비문
텍스트에 대한 회의
고구려 텍스트로서의 비문
-텍스트의 형상과 필자의 의도
-비문의 컨텍스트와 무훈 기사
비문의 컨텍스트와 왜
결론
본문내용
서론
광개토왕비는 현재 고구려의 수도였던 지린성 지안시에 위치해 있다. 1,580여 년 동안 비바람을 견뎌 온 광개토왕비는 6미터 남짓 크기로 그 위용을 떨치고 있다.
일본 육군은 일찍이 이 비석을 일본에 반입하여 제실박물관에 진열하려는 계획을 세운 적이 있었다. 왜군의 패배를 기록한 이 비석을 일본 국민들 눈앞에 보여줌으로써 고대 일본의 대륙 진출 추이를 자세히 알게 하고, 러일전쟁 후의 정세에 국민적 규모로 대비할 수 있는 마음가짐을 환기하는 데 유용하게 하고자 하는 그 나름의 현실적인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다행히 그 계획은 실현되지 않았다.
일본에서의 광개토왕비를 전시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지만, 오늘날 남북한에서는 복제품을 적절한 장소에 전시함으로써 이를 다른 형태로 실현시켰다. 북한에서는 조선중앙역사박물관에, 한국에서는 독립기념관 제1전시실 입구 정면에 복제품을 전시하고 있다. 남북한에서는 비석에 적혀 있는 광개토왕의 위업을 오늘날의 한민족의 긍지로 여기며 역사의식의 육성에 크게 활용하려 하고 있다. 또 중국에서도 광개토왕비는 중국 동북 민족, 즉 중국 국민의 중요한 역사적 유물로서 극진하게 관리되고 있다.
이상과 같이 그 의도에는 조금씩 차이가 있지만, 네 나라의 국민 교육에 저마다 광개토왕비가 특히 중요시되고 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광개토왕비는 단순한 비석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광개토왕비문은 고구려 멸망(668년) 후부터 1,200여 년 동안 텍스트로서 주목받은 적이 결코 없었으며, 19세기 말에 ‘발견’되자마자 역사 저편에서 홀연히 소생되었다.
이제 광개토왕비문은 고구려의 텍스트라는 사실을 초월하여 근대 동아시아의 여러 민족, 여러 국가에 의해 자기 국가, 민족의 컨텍스트에 따라 해석되어 이용되고 있는 상황에 처해 있다.
본론
광개토왕비의 외형과 비문의 내용
장수왕이 아버지 사후 3년상을 지낸 뒤 아버지의 유해를 능묘에 매장하고 그 옆에 건립한 것이 광개토왕비였다.
비석의 외형적 특징을 살펴보면 비석은 각력응회암이라고 하는 자연석으로 만들어졌으며, 높이 639cm, 한 번의 길이가 135~200cm에 이르는 네모기둥 모양을 하고 있다. 네 면에는 세로로 폭 14cm 전후의 괘선이 새겨져 있고 각 행에 정연하게 비문이 새겨져 있다.
비문은 서론과 두 가지 내용을 담고 있는 본론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처럼 크게 세 단락으로 구성되어 있는 비문에는 고구려의 건국 신화에서 시작하여, 동아시아의 유동적인 국제 관계, 고구려의 이민족 지배 ․ 수묘인 체제 ․ 고유법 등 문화의 여러 가지 모습이 묘사되어 있다.
이렇게 풍부한 내용 중 특히 문제가 되어온 부분이 있는데, 본론 제1단의 무훈기사 중에 32자가 각별한 과심을 끌었고 고대 동아시아의 국제 관계를 둘러싸고 오늘날까지 논쟁이 지나칠 정도로 전개되어 왔다. 근대 텍스트로서의 비문은 바로 이 32자에 집약되어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이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