춘추전국시대의 정치
- 최초 등록일
- 2006.12.07
- 최종 저작일
- 2006.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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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중국의 고대 춘추전국시대의 정치에 관한 레포트입니다.
목차
머리말
1. 春秋時代의 國의 구조와 정치
2. 春秋 中期 以後의 諸變動
3. 戰國時代의 政治와 社會
맺음말
본문내용
머리말
B.C.770년 이민족 견융(犬戎)의 침입으로 유왕(幽王)이 피살되면서 서주시대(西周時代)는 막을 내린다. 이듬해 유왕의 아들 평왕(平王)은 일부 제후의 도움을 받아 낙읍(洛邑)으로 천도를 하는데 이른바 주의 동천(東遷)이다. 이후 B.C.221년 진(秦)의 천하 통일까지를 동주시대· 춘추전국시대라고 한다.
춘추(春秋)란 말은 공자가 편찬하였다고 하는 노(魯)나라의 연대기인 ≪春秋≫에서 유래하고 전국시대의 명칭도 그 시대의 사실을 적은 ≪戰國策≫에서 비롯되었다.
춘추전국시대가 중국사상 회유의 획기적 전환기이자 격심한 변동기였음은 주지의 사실이고, 그 같은 성격은 정치, 경제, 사회 등 여러 부분에 걸쳐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본론에서는 그 중에서도 춘추전국시대의 정치적인 면을 중심으로 다루어 보려고 한다.
1. 春秋時代의 國의 구조와 정치
(1) 國의 구조와 영역범위
춘추시대에는 周代의 봉건제도에 의하여 지방에 분봉된 무수한 國이 이었다. 이러한 국의 구조를 파악하는 일은 이 시대의 정치를 이해하는데 중요한 열쇠가 된다.
殷代부터 춘추시기까지 중국사회를 구성하는 기본단위는 邑으로 불리는 취락형태이다. 이러한 취락은 간단한 방어시설을 갖추고 있는 소규모의 취락에서부터 성벽으로 둘러쌓인 도시형태로 발달한 대취락(大聚落), 그리고 제후의 王都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국은 내성과 외성에 둘러쌓여 있고, 외성 밖으로 광대한 들판이 있다. 들판 가운데 비(鄙)라고 하는 무수한 소읍이 있어 국이 이를 지배하고 있었다. 춘추시대의 국은 대체로 중앙의 내성과 그 밖에 있는 외성까지의 지역을 포함하며, 이곳에 사는 사람은 국인(國人)이고 지배계급이었다.
이와 같은 국을 둘러싼 성곽 밖의 교외에는 넓은 교(郊)와 野(야)가 있다. 들판 여기 저기 흩어져 있는 적은 취락이 비읍(鄙邑)이다. 이곳에 사는 사람을 야인(野人) 또는 비인(鄙人)이라 하며 국인과 구분하였다. 춘추 초기에는 아직 영토의식이 뚜렷하지 않았기 때문에 국과 국 사이의 야는 어느 국에도 소속되지 않고 공백지대로 방치되어 있었다. 이 지역이 후세에 분쟁의 대상이 되었는데 그 까닭은 읍을 이탈한 소농민들이 이곳을 개간하여 집단적인 취락을 형성하면서부터이다.
참고 자료
이성구, 「春秋戰國時代의 國家와 社會」,『講座 中國史1-古代文明과 帝國의 成立』, 지식산업사, 1989, PP. 89~156
翦伯贊, 「中國全史(上)」, 학민사, 1990
申採湜, 「東洋史槪論」, 삼영사,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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