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월남파병
- 최초 등록일
- 2006.09.19
- 최종 저작일
- 2006.01
- 2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000원
소개글
월남파병에 관해 짧게 핵심만 정리한 것입니다.
간단하게 정리 되어 있어서 보시기 편할거예요
목차
1.배경
2.과정
3.월남파병결과
본문내용
1) 배경
미국은 베트남전에 군사적으로 직접 개입하기로 결정한 이후 한일관계정상화를 더욱 서둘렀다. 베트남전에 전력을 집중해야 하는 미국으로서는 한국에 대한 지원 부담을 조금이라도 덜고 싶었고, 그 방법은 국교회복을 통해 일본이 그 짐의 일부를 맡아주는 길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한국군의 파병도 한일관계회복이라는 전제 위에서 가능한 것이었다.
그런데 한국이 참전을 자청할만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그 이유는 다음과 같다.
첫째, 한일국교회복이 당시 한국 정부가 절실히 필요로 하는 투자재원과 정치자금을 마련해주는 호기회였던 것처럼, 베트남파병도 그와 유사하거나 그것을 상회하는 이득을 우리에게 가져다 줄 것이라고 당시 집권층은 생각했다.
둘째, 파병이 가져다주는 경제적 이익도 계산에 넣었다. 앞서 설명했듯이 정부는 1964년을 기점으로 개발계획의 방향을 수입대체에서 수출지향으로 틀었다. 그러나 해외시장을 개척한 경험이 일천한 한국으로서는 보다 많은 수출시장을 확보하는 일이 급선무였다. 이러한 관점에서 베트남은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상품판매처였다. 따라서 정부는 파병의 대가로 베트남에서 가급적 최대한의 경제적 이익을 보장받을 수 있도록 미국과 협상을 벌인 것이다.
셋째, 심각한 사회적 문제였던 높은 실업률을 해소시키는 데에도 도움이 되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정부는 이미 1963년부터 대외개방정책의 일환으로 노동력의 해외수출을 적극 추진하고 있었다.
넷째, 베트남 파병결정으로 주한미군의 베트남 이동배치 저지와 한국군 현대화를 이룰 수 있었다.
2) 과정
한일협정을 둘러싸고 농성, 시위, 진압, 그리고 휴교나 계엄령과 같은 충돌이 반복되고 있는 이면에서 한국군의 베트남 파병이 꾸준히 진척되고 있었다. 정작 미국은 명분 없는 전쟁이라 하여 반전운동이 드세게 일어났고, 군사비 부담 때문에 큰 어려움에 빠져 있었다. 1961년 11월 미국을 방문한 박정희는 군사정부에 대한 미국의 지지를 얻는 방안의 하나로 베트남 참전에 적극 나섰다. 결국 1964년 10월 31일 월남전 파견 협정을 맺는다.
한국은 미국의 동의와 독려 아래 1964년 9월 의무 요원 130명, 태권도 교관 10명 파견하였고 뒤이어 12월 28일 브라운 주한 미국 대사가 박정희 대통령을 방문하여 한국군 증파를 요청하였다. 이듬해 3월에 1개 공병 대대, 1개 경비 대대, 1개 수송 중대, 1개 해병․공병 중대로 구성된 비전투요원(비둘기부대) 2천여명, 그리고 동년 10월에는 드디어 전투 병력인 해병대(청룡부대)와 육군(맹호부대) 2만여명을 보내는 등 1969년까지 연인원 약 5만명이 파병되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