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어중문학]오경재
- 최초 등록일
- 2006.06.28
- 최종 저작일
- 2005.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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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중국 청나라의 진보적 지식인 오경재에 대한 레포트 입니다. 역사속에서는 항상 보수와 진보 양 진영의 대립이 존속해왔습니다. 중국의 청나라에서도 이러한 양상이 발견됩니다. 그 중 진보 진영에서 단연 돋보이는 뚜렷한 인물은 오경재입니다. 날카로운 풍자로 보수적 퇴폐적이었던 당시 보수 성향을 지적했던 그의 일생을 짚어보았습니다.
목차
1. 당시 시대 상황
2. 생애
3. 집필 동기
본문내용
1. 당시의 시대 상황.
당시는 청 왕조 정권이 비교적 공고해진 시기였다. 청 왕조는 정치, 군사상에서 성과를 거둠과 동시에 문화 영역에서의 통제도 강화하였다. 청 왕조의 집권자들은 문인들에 대하여 농락과 고압의 정책을 썼는 바 이학을 선양하고 예교를 숭상하며 팔고문(八股文)을 시험 내용으로 하는 과거 제도를 채용한 것 등은 문인들의 사상을 마취시키고 그들을 농락하기 위한 수단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문자옥(文字獄)으로 지식인들을 억누르고 각종 서적들에 대하여 대대적으로 검사하고 금지하여 없애버린 것 등은 문인들에 대하여 취한 고압 정책이었다. 옹정(雍正) 황제가 통치한 13년 동안 (즉, 오경재가 23세로부터 35세가 되기까지의 사이)만 하여도 적지 않은 문인들이 해마다 자기가 쓴 글 때문에 화를 입었다.
그리고 그러한 정치적 상황 속에서 살아가던 사람들은 점차 폐단과 해악이 드러나기 시작한다. 봉건 사대부들은 무능해지고 동시에 뇌물을 탐하면서 법을 어기는 등의 행태를 보였고, 토호와 악덕 인사들은 백성들에게 횡포와 인색함을 보이면서 각박한 풍토를 보인다. 또한 관리들은 자신들의 허영심을 만족시키기 위해 유명 인사들과 교제하면서 거드름을 피웠으며, 이러한 전반적인 사회 분위기 속에서 봉건제도 전체는 점차 허위의식으로 부패해 가기 시작하였다.
2. 생애
오경재는 청는 자를 민헌(敏軒) 혹은 문목(文目)이라 하고 호를 입민(粒民)이라 불렀으며 안휘 전초(全椒)사람이었다. 그가 태어난 가문은 원래 대관료 지주 가문이었으나 그의 부친 때로부터 가정 형편이 기울어져 갔다. 吳敬梓의 집안은 증조부와 조부의 양대에 걸쳐 文名으로나 官途에 있어서 크게 이름을 떨쳤다. 이 점에 대해서는 吳敬梓 자신도 자신의 글이나 작품 내 곳곳에서 이에 대한 자부를 드러낸 바 있다. 그러나 그의 아버지로 알려져 있는 霖起는 그의 바로 윗대의 조상과는 달리 그렇게 큰 벼슬을 하지는 못했다. 그는 康熙 丙寅(1686)년에 拔貢이 되어 江蘇의 贛楡縣 敎諭를 지내다 壬寅年에 관직을 내놓고 그 다음해에 죽었다. 오림기는 정직하고 명리를 탐내지 않은 사람이었는데 그의 이런 사람됨은 오경재의 사상에 특정한 영향을 주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