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덕정과 제주목관아
- 최초 등록일
- 2005.09.06
- 최종 저작일
- 200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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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관덕정과 제주목관아에 대한 자료가 많지 않을 뿐더러 체계적인 자료를 구하기가 그리 쉽지가 않았습니다. 사료도 예전 것이고 정리가 안 되있어 최근 자료를 같이 참고하여 제가 나름대로 정리한 것이구요, 답사를 실제 해 보긴 했지만 사진상태가 안 좋아 홈페이지의 사진을 참고했습니다.도움 되시길 바랍니다.
목차
≪관 덕 정≫
1. 들어가며
2. 규모와 목적
3. 구조
4. '관덕(觀德)’의 유래
5. 관덕정을 더욱 아름답게 하는 것들
6. 역사적 의의
≪제주목 관아지≫
1. 문화적 역사적 가치
2. 역사적 변천
3. 구조
4. 주요 관아시설
5. 나오며
※ 참고문헌
본문내용
1. 들어가며
서울시를 상징하는 데 남대문이 종종 등장하는 것처럼 제주시 삼도 1동에 자리잡은 관덕정(觀德亭)도 그에 견줄 수 있다. 제주시 한복판에 자리잡았다는 이유도 있지만, 제주에 현존하는 건축물 가운데 그 역사가 가장 오래된 관아 건물이기 때문이다.
2. 규모와 목적
이중기단 위에 세운 정면 5칸, 측면 4칸짜리 단층 팔작지붕으로, 창호문 없이 사방이 개방된 정자 형식인 관덕정은 세종 30년(1448)에 제주 목사 신숙청에 의해 병사를 훈련시킬 목적으로 지어졌다. 창건 이후 성종 11년(1480)에 중수되었으며 1969년까지 여러 차례 중수와 개축을 거쳤는데, 1924년 보수 때 일제가 15척 이상 나온 처마를 2척 이상 잘라버려 외형이 크게 손상되었다.
관덕정은 세종 30년에 제주 목사 신숙청이 병사를 훈련시킬 목적으로 창건한 건물로, 창건 후에는 병사의 훈련뿐만 아니라 공사를 의논하거나 잔치를 베푸는 곳, 또는 죄인을 다스리는 곳으로도 사용되었다. 관덕정은 제주에 현존하는 건물 중 가장 오래되었다.
3. 구조
「홍화각기」(弘化閣記)에 의하면 제주목 관아가 불에 타자 세종 17년(1435)에 재건했는데, 관덕정을 중심으로 왼쪽에는 목사의 동헌과 부속시설이, 오른쪽에는 판관의 동헌과 부속시설이 편중되어 있었다고 한다.
4. ‘관덕(觀德)’의 유래
관덕정이란 이름은 평소 마음을 바르게 하고 훌륭한 덕을 닦는다는 ‘사자소이관성덕야’(射者所以觀盛德也 : 활을 쏘는 것은 높고 훌륭한 덕을 보는 것이다)라는 글귀에서 유래했다. 관덕정에는 현재 ‘관덕정(觀德亭)’ , ‘湖南第一亭’(호남 제1정), 耽羅形勝(탐라형승) 등 세 개의 현판 글씨가 걸려 있다. 창건 당시에는 세종의 셋째 아들인 안평대군이 글씨를 쓴 ‘觀德亭’ 현판이 걸려 있었다고 하는데, 어느 때인가 불타 없어졌다고 한다.
참고 자료
「탐라순력 창간호」, 사단법인 탐라문화보존회
한국문화유산답사회, 「한려수도와 제주도」, 돌베개
「耽羅, 歷史와 文化」, 제주사정립사업추진협의회
http://mokgwana.jejusi.go.kr/
http://www.ocp.go.kr:9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