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안문 사태] 천안문 사태
- 최초 등록일
- 2004.11.26
- 최종 저작일
- 2004.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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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안문 사태의 성격과 의의, 그리고 나의 느낌
본문내용
급격한 발전으로, 세계 초강대국인 미국마저도 경계심을 늦추지 않게 하는 중국.
좋은 것도 과하면 문제가 생기기 마련이다. 중국이 이렇게 깨어가며 급성장하는 밑바탕에는 수많은 이들의 희생과 무력이 들어갔다.
덩샤오핑은 1987년 3월 "안정은 모든 것을 압도 한다"고 말했다고 한다. 경제 발전의 도상에 있는 중국으로서는 정치적 안정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1989년 4월 15일 후 야오방이 사망한 다음날 베이징 대학에는 "죽어야 할 사람은 죽지 않고 살아야 할 사람이 죽었다"라는 대자보가 붙었다. 베이징 대학생 6천여 명이 후 야오방의 재평가를 요구하며 천안문에 모여 시위를 시작했다. 그 날 이후 천안문 광장의 시위대 수는 날이갈수록 늘어 갔다.
1989년 6월 4일, 천안문 광장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며 시위를 벌이던 학생과 시민을 중국 당국이 무력으로 진압하는 천안문 사태가 일어났다.
1989년 5월 말부터 시작된 시위의 목표는 민주화나 자유화가 아닌 덩샤오핑과 중국 공산당 내부의 비리, 인재등용에 있어 철저한 인척관계와 정치적 영향력이 있는 집안 출신이 득세하는 현실을 비난하는 비정치적 시위였다. 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이 시위는 일반시민인은 물론이며 중국 정부의 공무원, 외교관, 세관원, 기자 등 언론인과 공안들까지 지지했다. 그러나 6월에 접어들면서 차차 정치적 자유와 민주화를 요구하는 식으로 성격이 변하게 되었고 베이징 소재 대학생들의 가세로 시위의 성격에 변화가 오게 되었다. 이들은 소련의 체재가 흔들리고 있고 민주화로 바뀌지 않으면 중국도 소련의 전철을 밟을지 모른다는 위기감을 심어줬다.
참고 자료
중앙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