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제승방략 전술과 탄금대 전투 (레포트)
- 최초 등록일
- 2022.01.11
- 최종 저작일
- 202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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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사개론 A+ 레포트입니다.
목차
1.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방어전략 및 초기 전황
2. 탄금대 전투의 배경과 전개
3. 제승방략의 근본적 문제점
본문내용
당시 신립은 결전의 장소로 다양한 장소를 물색했다. 그 중 하나는 조령으로, 그곳을 중심으로 한 방어는 적지 않은 수비적 이점을 가질 것으로 여겨졌다. 조령은 소백 산맥을 이루는 고개 중 하나로, 그 자체가 천혜의 요새다. 일본군이 한양으로 가기 위해선 반드시 지나야 하는 소백산맥의 가장 주요한 고개이기도 했으며, 이일이 한 번 패배했던 상주와 주변에 신립 군이 주둔중이었던 충주를 잇는 연결 지점으로 그 전략적인 중요성이 대두되는 장소였다. 김여물 등이 이곳에서의 방어를 주장했다. 그러나 충주에서 조령까지는 도보로 열 시간 정도의 거리가 있었다. 날짜들을 따져 볼 때, 신립에게 군사를 이끌고 조령으로 이동할 하루 남짓의 시간이 있었던 것은 맞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결과론적인 분석이며 도착 후 신립의 군사들이 충분히 방어태세를 갖추기에는 충분치 못한 시간이 남아있었을 가능성 역시 적지 않다. 또 조령이 소백 산맥의 주요 고개인 것은 맞으나 유일한 것은 아니었으며, 조령에 방어 여력을 집중할 경우 다른 경로로 산맥을 넘은 일본군의 우회 공격을 허용할 위험도 무시할 수 없었다. 무엇보다도, 신립은 작전과 그의 전술에서 가장 중요한 기병을 제대로 활용하기 어렵다는 이유로 조령을 포기하게 된다.
<중 략>
병종 간 협동이 어려운 조선군의 상황을 파악한 고니시가 좌우에 매복해 있던 요시토시와 시게노부의 군사들을 투입한다. 일본군 복병이 전열을 미처 가다듬지 못한 채 평야에 남겨진 신립의 병사들을 역습하면서 조선군의 패색이 짙어진다. 평야가 전투로 혼란한 사이, 고니시가 차출해 둔 병력이 방어가 약화된 충주성을 함락시킨다. 신립은 충주성으로 급하게 떠났지만 성 목전에서 일본군의 반격에 격퇴 당하였고, 지휘관이 부재한 평야의 조선군은 오히려 더 큰 피해를 입는 등 일본군이 전투의 승세를 굳혀간다. 결국 신립과 잔존 병사들은, 잘 알려져 있듯이 탄금대에서 최후의 저항 끝에 전멸하게 된다. 고니시 군의 후위에서 진격하며 조령을 넘은 가토 군은 조선군과 직접 교전하지는 않았는데, 프로이스는 그의 저서 일본사에서, 전투에 가세하려는 가토를 고니시가 거부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그러나 프로이스의 기록 외에 왜 전투에 참가하지 않았는가, 혹은 참가할 수 없었는가에 대해서는 명확히 밝혀진 내용이 없다.
참고 자료
김성남, 『전쟁으로 보는 한국사』, 수막새(2005)
조원래, 『임진왜란사 연구의 새로운 관점』, 아세아문화사(2011)
『신립이 탄금대를 선택한 것에 대한 고찰』
김연지,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전에 대한 지정학적 연구』
이상훈, 『신립의 작전지역 선정과 탄금대 전투』, 경북대학교 아시아연구소
장정수, 『17세기 전반 조선의 조총 양성과 운용』, 고려대학교 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