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문학의 갈래 ) 첨부한 교안 위에 나온 작품들 이외의 한국 시조 혹은 향가를 하나 선정해 1. 작가소개 2. 시의 창작 배경 3. 시의 의미 4. 분석과 생각
- 최초 등록일
- 2021.07.20
- 최종 저작일
- 2021.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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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작가소개: 이세보
2. 월령시조의 창작 배경
3. 시의 의미
(1) 원문
(2) 의미 풀이
4. 분석 및 생각
5. 출처 및 참고문헌
본문내용
이세보는 조선 후기의 인물로 수많은 시조를 남긴 대표적인 인물이다. 이세보에 대하여 연구한 양덕점(2007)의 연구논문에 따르면, 이세보는 1832년에 태어나 1895년에 생을 마감했으며, 약 60년의 생애 동안 458수의 작품을 집필한 다작가이다. 그는 사대부이자 왕손의 신분이었고, 이에 따라 이세보의 시조는 조선 후기의 시조 및 사대부 시조에서 상당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시인 이세보에 대한 연구는 일찍이 1980년대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진동혁(1981)은 이세보의 인생을 다음과 같이 3가지의 시기로 나누었다. 먼저, 제1기는 태어나 관직에 나가있던 시기, 즉 유배 이전까지의 시기(1832년부터 1860년까지)이다. 이세보는 순조 32년에 4남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고, 선조의 셋째아들인 의안군의 9대손이자 능원대군의 8대손이다. 그러나 이세보가 출생한 시기에 이르러서는 왕실과 촌수가 멀어져, 그는 왕족의 대우를 받지는 못 한 것으로 보인다. 다만, 이세보가 20세가 되던 1851년에 풍계군의 양자로 받아들여져 당시 임금이었던 철종과 6촌이 되었다. 이어서 이세보는 종 이품 관직인 중의대부 부총관과 정 이품 관직인 승헌대부에 올랐으며, 22세에 정 일품 관직인 현록대부가 되는 등 탄탄대로를 걸었다. 이는 이세보가 29세였던 1860년까지였다.
다음으로, 제2기는 유배생활 기간(1860년부터 1863년까지)이다. 그의 유배는 동생의 관직 진출과 연관되었다. 철종 11년에 이세보의 동생 이세익이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나아가게 되었는데, 당시 관리들의 반대에 부딪치면서 논란에 휩싸였고, 이세보까지도 유배길에 올랐다. 그는 전라도 강진에 유배되었고, 앞서 양자로 받아들였다고 언급한 풍계군과의 부자관계도 끊겼다.
마지막으로, 제3기는 유배에서 풀려나 생을 마감할 때까지의 시기(1863년부터 1895년)이다. 이세보는 고종이 즉위하며 정권이 바뀐 후 유배에서 풀려났다.
참고 자료
양덕점(2007). 이세보 시조 종장말의 표현 연구. 청주대학교 박사 학위논문.
장린린(2015). 시조를 활용한 한국어 교육 방안 연구 : 이세보의 월령체 시조를 중심으로. 청주대학교 석사 학위논문.
진동혁(1981). 이세보의 시조 연구. 단국대학교 박사 학위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