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승로의 시무 28조
- 최초 등록일
- 2020.05.09
- 최종 저작일
- 20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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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최승로의 시무 28조』"에 대한 내용입니다.
목차
Ⅰ. 들어가며
Ⅱ. 본문
1) 최승로의 출생
2) 시무 28조
3) 최승로가 추구하고자 했던 이상국가
Ⅲ. 나가며
본문내용
Ⅰ. 들어가며
고려시대에서의 중앙집권을 실현하고 귀족정치를 통하여 유교적 정치와 사상을 꽃피우게 던 왕은 여러분들은 누구라고 생각할 수 있는가? 많은 이들이 성종을 뽑을 수 있을 것이다. 그는 고려 초의 불안하던 왕권을 든든하게 지지하고 완전히는 아니지만 어느 정도 지방의 향호(鄕豪)세력을 억제하여 중앙집권체제를 이루어 강한 왕권을 가질 수 있었다. 이 같은 성종의 정치가 성공에 이를 수 있었던 것은 최승로나 이양, 김심언 같은 유신(儒臣)들의 건의와 보좌에 힘입은 바가 컸다고 할 수 있겠다. 이들 중 이번 발제에서 다룰 인물은 최승로이며, 이 유신이 상서문을 통해 성종 이전의 다섯 왕에 대해 평해놓은 오조정적론(五朝政績論)과 시무(時務) 28조 중, 유실된 6개가 제외된 시무 22조를 중점적으로 살펴보아 당시 그가 추구하고자 했던 유교적 질서와 그의 정치사상을 알아보도록 하겠다.
Ⅱ. 본문
1) 최승로의 출생
최승로는 경애왕 4년(927)년에 신라의 서울 경주에서 태어났다. 이때는 견훤이 후백제를 세운지 36년이 되는 해요, 고려 태조 10년이었다. 그러므로 후삼국이 정립하여 서로 싸우는 내란기였다. 그는 이렇게 유년기를 격변하는 시대의 신라의 서울에서 태어났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이 그로 하여금 국가의 통일과 안정을 희구하는 마음을 간절하게 하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2) 시무 28조
- 원문인용
一條: 我國家統三以來四十七年士卒未得安枕糧餉未免糜費者以西北隣於戎狄而防戍之所多也.願聖上以此爲念. 夫以馬歇灘爲界太祖之志也鴨江邊石城爲界大朝之所定也. 乞將此兩處斷於宸衷擇要害以定疆域.選土人能射御者充其防戍又選其中二三偏將以統領之則京軍免更戍之勞芻粟省飛挽之費矣.
二條: 竊聞聖上爲設功德齋或親碾茶或親磨麥臣愚深惜聖體之勤勞也.此弊始於光宗崇信讒邪多殺無辜惑於浮屠果報之說欲除罪業浚民膏血多作佛事或設毗盧遮那懺悔法或齋僧於毬庭或設無遮水陸會於歸法寺.每値佛齋日必供乞食僧或以內道場餅果出施丐者或以新池......중략.....今聖上在位所行之事與彼不同但此數事只勞聖體無所得利願正君王之體不爲無益之事.
참고 자료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16 : 고려 전기의 종교와 사상』,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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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기백, 『崔承老上書文硏究』, 一潮閣 , 1993
이정선, 『고려시대의 정치변동과 대외정책』 , 경인문화사 , 2004
홍승대, 『高麗政治史硏究』, 一潮閣 , 2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