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글
조선통신사의 시작과 메이지 유신 이후 종말을 맞기 전까지의 자료가 담겨있습니다.
목차
Ⅰ. 조선통신사란?
1. 조선통신사의 명칭
2. 통신사에 참여한 사람들
3. 조선통신사와 일본국왕사
Ⅱ. 조선통신사의 이동경로
1. 조선통신사의 이동경로
2. 일본국왕사의 이동경로
3. 국서개작사건
Ⅲ. 시대별 통신사 파견 목적
1. 당시 국제 정세
2. 파견 기록
3. 시대별 사절의 명칭
4. 조선 전기와 후기 통신사의 파견 목적과 비교
Ⅳ. 일본에 영향을 미친 조선의 문화
1. 식문화
2. 편액과 시문
3. 그림
Ⅴ. 통신사의 종말
1. 대마도 역지 빙례
2. 막부 말기의 정한론(征韓論)
참고문헌
본문내용
Ⅰ.조선통신사란?
1. 조선통신사의 명칭
임진왜란 이후 단절된 국교를 회복하고자 일본 막부의 요청에 의해 조선에서 일본으로 파견된 공식사절단을 조선통신사라고 한다. ‘통신’(通信)이란 ‘신의를 나눈다’는 의미로 조선통신사를 통한 교류는 신뢰를 기반으로 한 조선과 일본의 평화와 선린우호(善隣友好)를 상징한다고 할 수 있다.
조선시대에 ‘통신사’라는 이름으로 일본에 사신을 파견한 것은 세종 대부터였다. 그러나 1592년(선조 25) 왜군의 침략으로 발발한 임진왜란을 겪은 이후, ‘믿음으로 통한다’는 의미의 ‘통신’(通信)이라는 명칭 사용의 부당함이 제기되어 1607년(선조 40), 1617년(광해군 9), 1624년(인조 2)의 세 차례는 ‘회답 겸 쇄환사’(回答兼刷還使)라는 이름으로 사신을 파견하였다. 그 명칭에 ‘쇄환’이라는 표현을 쓴 것은 당시 일본행의 긴급한 현안이 임진왜란 당시 잡혀간 포로 쇄환의 문제였기 때문이다. 이후 1636년(인조 14)부터 다시 ‘통신사’라는 이름을 회복하게 되었고 1811년(순조 11), 제12차를 마지막으로 조선통신사의 활동은 막을 내렸다.
1607년부터 1811년까지 204년간 이어진 조선통신사의 일본 파견은 조선과 일본 사이에 이루어진 ‘문화교류’의 다양한 면면을 찾아볼 수 있으므로 양국의 문화교류사적 측면에서 주목할 요소가 많다. 조선통신사는 300~500명의 거대한 집단 이동을 통해 단기간(5~10개월)에, 정해진 코스로 ‘이동’했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문화 전파와 교류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특수성을 지닌 집단이었다.
이 집단은 통신사 외에 다음과 같은 명칭으로도 불렸다.
■ 통신사通信使 : 믿음을 통하는 사절
■ 보빙사報聘使 : 답례로서 외국을 방문하는 사절
■ 회례사回禮使 : 사신을 보내 왔을 때 그 답례로 파견하는 사절
■ 국사國使 : 나라를 대표하는 사절
■ 회답겸쇄환사回答兼刷還使 : 일본의 서계에 대한 답과 백성을 쇄환하기 위한 사절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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