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 청(淸)나라의 시초
- 최초 등록일
- 2003.06.10
- 최종 저작일
- 200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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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정치과정의 개관】
【행정】
【사회·경제】
【문화】
【미술】
【한국과의 관계】
본문내용
명(明)나라 이후 만주족(滿洲族) 누르하치[奴兒哈赤]가 세운 정복왕조(征服王朝)로서, 중국 최후의 통일왕조(1636∼1912). 중국의 근대사는 이 왕조 말기부터 시작된다.
【정치과정의 개관】 만주인은 수렵·어로를 주된 생업으로 하는 퉁구스족의 일파로서 본래 여진(女眞) 또는 여직(女直)이라 불리었다. 그 일부는 12세기에 화베이[華北]로 진출하여 금(金)왕조를 세웠으나, 만주에 잔류한 대부분은 점차 정착농업을 영위하였으며, 명조 말기에는 해서(海西)·건주(建州)·야인(野人)의 3부로 나누어져 명나라의 간접통치를 받고 있었다. 명나라는 여진족의 여러 부족에 대하여 시종 분열정책을 취하였으나, 조선의 임진왜란(1592∼98)을 전후하여 만주에 대한 명나라의 통제력이 이완된 틈을 타서 건주좌위(建州佐衛)의 수장(首長) 누르하치가 여진의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1616년 스스로 한(汗)의 위(位)에 올라 국호를 후금(後金)이라 하고, 선양[瀋陽]에 도읍하였다. 이 사람이 청나라의 태조이다. 명나라는 이를 제압하려 하였으나 오히려 사르후의 싸움에 대패하여(1619) 랴오허강[遼河] 동쪽을 잃었다. 이어 일어난 황타이지[皇太極:太宗]는 먼저 명과 조선의 연합을 막기 위해 두 번에 걸쳐 조선에 침입하였다(1627·36). 또 내몽골로 진출하여 차하르부(部)를 정복하여 대원전국(大元傳國)의 새(璽)를 얻음으로써 36년 새삼스레 황제의 위에 올라 국호도 대청(大淸)으로 고쳤다. 이 시기에 명왕조의 사회적 모순은 궁정의 당쟁과 농민반란으로 집중되어 나타났는데, 44년 이자성(李自成)을 지도자로 하는 농민군은 드디어 베이징[北京]에 진입, 명나라를 멸망시켰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