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계천 복원사업
- 최초 등록일
- 2003.05.17
- 최종 저작일
- 200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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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청계천에 대한 설명(역사,유래)
청계천의 사업방안
청계천 사업으로 인하 효과
청계천 사업의 문제점
해결방안
결론
본문내용
청계천이라는 이름이 붙은 때는 1910년대. 그 전에는 그냥 개천(開川)이었을 따름이다. 근원부터 탁한 샘물은 어디 있으랴. 청계천도 상류에는 분명 이름 큼 맑은 물이 흘렀을 것이다. 박태원의소설 ‘천변풍경’이그려내는 빨래터도 분명 있었을 것이다. 청계천변의 세상은 두 종류로나뉘었다. 석축위의 세상과 아래의 세상. 석축위로는 가마를 탄 아씨가 지나가도 석축 아래 빨래터에는내일 아씨가 입을 저고리를 빨아야 하는 아낙네들이 모여들었다. 저고리가 깨끗해지는 만큼 물은 탁해졌다. 석축 아래로는 쓰레기가 쌓였고 거지, 땅꾼들이 모여들었다. 문제가 있으면 해결하기보다 가리는 것이 더 쉬웠을까. 난마(亂麻)같은 하수관 위에 첩첩이 쌓이는 건물들을 정비해서 하수처리장을 만들고 청계천에 맑은 물을 흐르게 하기에는 도시의 역량은 부족하기만 했으리라. 일제시대 때부터 시작된 복개공사는 1978년에 지금의 모습을 갖추었다. 빨래터도 묻혔고 청계천에서 가장 아름다운 다리였다는 수표교(水標橋)는 장충공원으로 옮겨졌다. 제일 넓던 다리, 광통교(廣通橋)는 지금은 장난감 같은 모형으로 만들어져 조흥은행 본점 모서리에 쪼그리고 있다. 덮인 청계천 위로는 고가도로까지 마련되었다. 그 위로는 두 발로는 올라갈 수 없고 네 바퀴로만 올라갈 수 있다.
청계고가도로는 3·1빌딩과 함께 이 땅의 근대화의 상징이었다. 둘이 다정히 포즈를 잡고 찍은 사진은 외국에 나갈 홍보책자에 반드시 끼어 들었다. 3·1빌딩과 똑같이 생긴 건물을 미국에서 보았다고 수군거려도 못들은 체했다. 아니 오히려 그래서 더 신나게 자랑을 했을지도 모른다. 미국을 흉내냄은 이 땅에서 길이요, 진리가 아니었던가.
청계고가도로는 야심이었다. 우리도 미국처럼 자동차를 타고 바람처럼 도시를 질주한다는 도시고속도로는 가슴 벅찬 계획이었다. 그러나 도심으로 자동차를 불러들이는 것이 마약임은 깨닫지 못했다. 도시의 주위를 순환하는 고속도로는 필요해도 관통하는 고속도로는 위험하기만 한 발상이다. 과연, 흉내는 냈는데 효과는 달랐다. 폭은 좁았고 오르내리는 경사는 급했다. 몽롱한 마약의 효과는 오래가지 않았고 밀려드는 자동차가 도로를 메웠다. 장안 최고의 추물이니 어서 허물어야 한다는 성토도 쉬지 않고 불거져 나왔다. 해결이 아니고 문제가 되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