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외교사(조선)
- 최초 등록일
- 2013.12.18
- 최종 저작일
- 201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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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외교사 정리자료입니다.
시기는 갑신정변에서 한일병합까지 입니다.
목차
1. 갑신정변 후 조선의 국제관계
2. 동학농민운동
3. 청일전쟁
4. 을미사변
5. 아관파천
6. 러일전쟁
7. 한일병합의 길
본문내용
갑신정변 이후 중국은 조선에 대한 지배관계를 더욱 강화하였다. 기존의 형식적인 전근대적 사대관계에서 실질적인 근대적 개념의 종속관계를 강화하기 위해 총통 위안스카이를 파견하였고 조선을 병합하자는 병합론이 대두되었다. 반면 일본은 갑신정변으로 인해 조선에서 일본세력이 거의 소멸되었고 더불어 조선에 대한 정책도 소극적으로 변화였다. 당시 일본은 국내외 사정으로 조선에 개입하지 못하였다. 불평등 조약개정문제로 정치적으로 분열이 있었고 당파 싸움또한 진행되고 있었다. 영국은 조선에서 러시아세력확장을 견제하기 위해 청의 진출을 지지하였다. 러시아는 조선에 관심이 있었지만 열강들과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조선의 도움요청에는 소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갑신정변 이후 청이 조선에서 주도권을 잡고 일본세력은 소멸되면서 청의 조선 내정 간섭이 본격적으로 심화되었다. 이에 조선은 청나라의 강력한 지배를 벗어나기 위해 러시아와 접촉을 시도한다. 조선과 러시아의 접촉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건이 4차례에 걸친 한아밀약사건이다. 1(1994.12. 갑신정변 직후)차는 당시 조선의 고문으로 파견되었던 뮐렌도르프의 주도로 러시아 외교관이 한양으로 와 고종과 면담을 가진 것이다. 뮐렌도르프는 일본 주재 러시아 공사와 접촉해서 러시아의 조선 보호를 요청하였고 보호의 댓가로 동해안의 영일만을 조차할 것을 제시하였다. 하지만 러시아측은 조선문제에 개입할 시 일본영국청과의 충돌을 우려하는 소극적 모습을 보여주었고 결국 협약은 무산되고 말았다. 2차는 (1885.2) 조선의 관리가 블라디보스톡(연해주)관리에게 러시아의 보호를 요청하는 국서를 전달한 것이다. 3차 사건은 일본 주재 러시아 외교관이 고종과 면담을 가진 것인데 이것은 조선과의 협약보다는 영국의 거문도 점령사건을 파악하기 위한 것이었다. 4차는 조선관리 심순택이 국서를 작성하고 민영익이 러시아 공사에 전달한 것이다. 당시 영국은 조선에서 러시아세력의 확장을 우려하여 러시아의 조선문제 개입을 적극적으로 반대하였고 청의 조선점령 지지를 선언하였다. 일본 또한 이 사건으로 인해 근본적인 해결책을 모색하게 된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