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대 올림픽의 정치적 사건
- 최초 등록일
- 2013.11.29
- 최종 저작일
- 20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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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역대 올림픽과 관련하여 정치적으로 일어났던 사건들을 정리한 것입니다.
스포츠 사회학 강의의 레포트였으며 A+를 받은 자료입니다.
목차
제 1회 대회 - 근대올림픽의 부활
제 2회 대회 - 만국박람회 부속 국제대회로 전락
제 3회 대회 - 올림픽 신대륙으로 무대 옮겨
제 4회 대회 - NOC로 신청통로 단일화, 국가대항전 계기
제 5회 대회 - IOC의 권위강화, 대회운영도 본 궤도에
제 6회 대회 (1차 세계 대전으로 취소)
제 7회 대회 - 올림픽기. 'Citus. Altius. Fortius'표어 등장
제 8회 대회 - 올림픽 선수촌 등장
제 9회 대회 - 올림픽 성화의 등장
제 10회 대회 - 선수촌, 프레스센타 가설
제 11회 대회 - 올림픽제단에서 채화된 성화 봉송
제 12회 대회 (제 2차 세계 대전으로 취소)
제 13회 대회 (제 2차 세계 대전으로 취소)
제 14회 대회 ? 정부수립 전 태극기 앞세우고 올림픽 참가
제 15회 대회 - 미국·소련의 경쟁, 올림픽 정치색 오염
제 16회 대회 - 폐막식 거행 새로운 올림픽 전통시작
제 17회 대회 - 약물복용 선수 사망 큰 오점
제 18회 대회 - 아시아지역 최초의 올림픽 개최
제 19회 대회
제 20회 대회 - 피의 참사...이스라엘선수 11명 사망
제 21회 대회 - 한국 광복후 첫 금메달 획득
제 22회 대회 - 미국 보이콧 선언 서방진영 동조
제 23회 대회 - 소련의 보복성 보이콧, 재현된 반쪽대회
제 24회 대회 - "12년만에 동서진영 한자리, 기록도 역대 최고 수준"
제 25회 대회 - 구소련 동독 해체, 새 판도 예고
제 26회 대회 - 폭탄테러와 교통대란...'상업주의' 문제
본문내용
제 1회 대회 - 근대올림픽의 부활
제1회 올림픽은 그리스 아테네에서 개최됐다. 아테네는 고대 올림픽의 전통과 향수가 살아있는 도시로써 근대 올림픽의 출발이 고대의 전통을 계승한다는 역사적 의미에서 파리를 제치고 첫 올림픽 개최지로 결정됐다.
쿠베르탕을 불신한 네덜란드와 올림픽 부활 자체를 비난하는 벨기에는 대회에 참가치 않았다. 제1회 대회가 1896년 4월초에 열리기로 미리 확정돼 있었음에도 1895년 말까지도 초청장이 발송되지 않아 선수들이 출전할 시간적 여유가 충분치 못한 것도 대회규모가 소규모에 머물게된 한 원인이 되었다.
참가국들은 대회에 관한 정보나 지식이 거의 없었다. 오늘날의 NOC같은 올림픽 관련업무를 전담할 조직체계도 존재치 않았으며 사전에 결성된 국가대표팀도 없는 개인적인 참가였다. 대회종목으로는 육상, 수영, 테니스, 체조(역도종목은 체조의 1종목에 포함시킴), 레슬링, '사이클, 펜싱 8개 종목 41개 세부종목으로 실시됐다.
제 2회 대회 - 만국박람회 부속 국제대회로 전락
제 2회 올림픽대회는 1900년 5월 20일부터 10월 28일까지 쿠베르탕의 활동무대인 파리에서 개최됐다. 정식명칭은 "만국박람회 부속 국제경기대회"로 만국박람회의 한 행사로 열려 올림픽 개최 본래의 의도는 퇴색됐으며 육상을 제외한 다른 경기는 전혀 주목을 받지 못하고 소외되었다.
올림픽경기가 만국박람회의 부속대회로 전락한 것은 쿠베르탕이 당초 기획했던 파리 올림픽을 스포츠박람회로 치르려던 구상이 무산되면서 예견됐다. 쿠베르탕은 고대의 이집트-인도(1부) 스포츠, 중세의 기사도(2부), 현대의 스포츠(3부)의 행사를 계획했으나, 올림픽 토대가 허약했던 당시로서는 실현키 어려웠었다.
결국 쿠베르탕의 계획은 무산됐고 대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조직위원회의 내분이 겹쳐 파리 올림픽은 암초에 부디 쳤다. 결국 대회를 무사히 개최하기 위해 쿠베르탕 IOC위원장 겸 파리 올림픽조직위원장은 프랑스 정부에 의존할 수밖에 없게 되었는데 이것이 만국박람회의 부속 국제경기가 된 주원인 이였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