측우기의 우수성
- 최초 등록일
- 2013.04.29
- 최종 저작일
- 2013.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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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만든시기
2. 제작배경
3. 구조
4. 유물
5. 의의
6. 측우기 사용방법
7. 편리하고 우수한점
Ⅲ. 결론
본문내용
Ⅰ. 서론
집에 오래된 물건을 조사하여 그에 대한 역사와 의의 제작배경 구조 등을 조사하여 생각함으로써 그냥 집 안 구석에서 잊혀져가는 물건에 대해 다시 알아보자.
Ⅱ. 본론
1. 만든시기
1441년(세종 23) 8월에 예조가 측우기를 설치할 것을 건의하여, 다음해 5월에는 측우에 관한 제도를 새로 제정하고 측우기를 만들어 서울과 각 도(道)의 군현(郡縣)에 설치하였다.
2. 제작배경
세종은 홍수에 의한 피해를 막기 위해 우량(雨量) 측정에 의한 기상현상의 파악을 기도하여, 처음(1423년경)에는 비가 온 뒤에 빗물이 땅속으로 스며들어간 흙의 젖은 깊이, 즉 우택(雨澤)을 재어서 보고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비가 오기 전의 토지의 상태가 건조한 또는 습한지에 따라 같은 정도의 비가 왔는데도 우택은 같지 않았고 또 그것을 실제로 측정하는 일에 어려운 점이 많았기 때문에, 18년 가량 실시한 뒤에 우택의 제도는 폐지하고 1441년(세종 23)에 측우기를 발명하여 관상감(觀象監)과 각 도의 감영(監營)에 비치하고 우량을 측정하도록 하였다.
3. 구조
이때 만든 측우기는 주철제(鑄鐵製)로서 깊이 약 41㎝, 지름 약 16㎝의 원통형이었다. 돌로 만든 대(臺) 위에 올려놓고 비 온 뒤에 그 속에 고인 빗물에 주척(周尺)을 꽂아 세우고 물의 깊이를 푼(分, 약 2㎜) 단위까지 재어 보고하도록 하였으며, 이듬해인 1442년에는 측우기의 규격을 약간 줄여서 깊이 약 31㎝, 지름 약 14㎝로 하였다. 그 까닭은 실제로 사용해보니까 깊이 약 41㎝에 빗물이 많이 차는 일은 거의 없으며 자를 꽂아 빗물의 깊이를 재기에는 너무 깊어서 불편하였고, 또 측정한 뒤에 물을 쏟아버리고 다시 측우대에 안치(安置)할 때 너무 무거워서 취급하는 데에 불편했기 때문이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