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제국의 멸망과 유럽의 형성에 관한 연구
- 최초 등록일
- 2012.11.08
- 최종 저작일
- 2012.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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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서양 중세사 중간 보고서 입니다.
목차
1. 로마제국의 몰락
1)동로마는 왜 서로마 제국의 멸망을 막지 못했을까?
2)또 다른 멸망요인, 정권교체
3)서로마제국의 해체, 468~476: 변경지역
4)서로마제국의 해체, 핵심지역인 갈리아와 에스파냐
5)제국의 중심지
2. 유럽의 형성
1)서로마제국의 멸망과 게르만족 왕국의 건설
2)아랍세계의 승승장구
3)슬라브 유럽의 탄생
4)서유럽의 바이킹
5)이주의 끝, 유럽의 탄생
본문내용
1. 로마제국의 몰락
학계 일각에서는 진창에 빠진 서로마를 동로마가 좀더 적극적으로 지원해주지 않은 것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견지해왔다. 동로마는 이 당시 10만 명에 이르는 가용병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단지 도와주고 싶지 않다는 이유로 서로마 정치에 개입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당시 동로마는 자국 전선들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해결하기에도 바빴다. 그 점을 감안하면 5세기에 동로마가 서로마에 제공한 원조는 결코 하찮은 게 아니었다.
⓵동로마는 왜 서로마 제국의 멸망을 막지 못했을까?
동로마제국의 군사력은 튼실했다. 그러나 문제는 제국의 병력 상당수가 동쪽 국경선의 두 요충지인 아르메니아와 메소포타미아에 묶여 있다는 것이었다. 그 지역에 위치한 페르시아는 로마를 이어 제2의 강국으로 군림하고 있었고, 로마제국은 사산 왕조의 위협으로 군사적, 재정적 위기를 맞았고, 그런 상황이 50년간이나 지속되었다. 그러다 280년대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시대에 이르러 로마제국은 필요한 자금과 인력을 간신히 확보했으나, 동방의 초 강대국인 페르시아와의 분쟁을 조정하는 고정은 길고도 험난했다.
5세기 서로마에 대한 동로마의 군사지원을 논할 때는 반드시 그런 페르시아의 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로마제국은 300년 무렵부터는 페르시아의 위협을 그럭저럭 봉쇄하고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위협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동로마는 363년 율리아누스 황제의 페르시아 원정이 실패로 돌아간 데 이어 370년대에는 훈족에 이한 도나우강 국경지역의 혼란이 장기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자, 대단히 파격적인 조건으로 페르시아와 강화조약을 맺었다. 이어 발렌스 황제도 여러 번의 시도 끝에 이전에 잃어버린 지역들을 수복하는 듯 했으나 하드리아노폴리스 전투에서 전사하는 바람에 그 역시 무위로 돌아갔다. 그렇게 되자 테오도시우스는 로마가 상실한 지역들을 그대로 인정해주고, 또 다른 분쟁의 씨앗인 아르메니아에 대해서도 페르시아 쪽에 유리한 조건으로 협약을 맺을 수밖에 없었다.
동로마의 이런 양보로 사산 왕조의 요구가 대부분 수용되면서 이후 양국의 관계는 비교적 순탄하게 흘러갔다. 하지만 훈족의 침략으로 페르시아와 로마는 전례 없는 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서 당시 로마-페르시아 관계는 더할 수 없이 평온했다.
동로마가 서로마를 적극 지원하지 못한 이유는 또 있는데, 무엇보다 450년까지는 훈족의 공격에 맞서야 하는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아틸라 아들들이 460년대 말에는 서로마가 아닌 동로마를 침공했고 그보다 이른 460년대 초에는 아틸라의 붕괴된 전쟁기계의 잔존세력인 비겔리스 및 호르미다크 군대와 전쟁을 벌여야 했다.
이렇듯 동로마는 페르시아 전선의 병력을 줄이는 것도 불가능하고 또 훈족이 야기한 문제로 도나우강 국경지역에 서로마와 함께 막대한 재원을 쏟아 부어야 하는 이중고에 시달렸다.
참고 자료
로마 제국 최후의 100년, 피터히더,
로마 제국과 유럽의 형성, 피터히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