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편전쟁
- 최초 등록일
- 2012.10.03
- 최종 저작일
- 201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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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편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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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아편전쟁의 의의는 청나라와 영국 사이에 일어났던 전쟁이라고 할 수 있는데 2번에 걸쳐 일어났다.
우선 이 전쟁의 배경을 살펴보기 위해 청나라에 대해 알아보자면 화이문화의 공존과 근대중국 탄생의 나라라고 볼 수 있다.
역사적 시각에서 본다면 송대부터 아편전쟁 이전의 청대 중엽까지의 900여 년간은 기본적으로 동질적인 사회라고 볼 수 있는데, 그 이면에는 유교적 지식인인 사대부가 지배층인 사회구조가 송대에 확립되어 청대까지 본질적인 변화없이 이어져 왔다는 인식에 바탕을 둔다.
이해를 좀더 넓히기 위해 송대의 유가사상에 대한 관심의 확대와 신유학의 탄생을 조금 알아본다면, 송대는 민생을 중시하고 큰 정치를 펼쳤다.
송대는 국방력의 약화로 인한 이민족과의 끊임없는 충돌은 지식인들의 사회적 책임감과 정치참여의식을 고취시켰다.
<중 략>
1. 애로우호 사건
아편전쟁의 패배로 막대한 배상금을 지불하게 된 청조는 사회·경제적으로 어려움을 당하게 되었고, 그것이 결국 태평천국운동으로 폭발하였다(1850).
한편 영국의 입장에서 보면 남경조약에 의하여 5개항이 개항되었으나 항구와 연결되는 내륙수송의 요로인 양자강 등의 내륙하천은 아직 개방되지 않았다. 그 위에 외국인의 중국내지여행과 크리스트교의 포교활동도 자유롭지 못하였다. 또 남경조약의 적용범위도 양국간 해석의 차이를 보였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남경조약에 의해 개항된 5개 항구는 대부분이 강남쪽에 위치하여 청나라의 수도 북경과는 거리가 멀리 때문에 청조에 대한 정치적인 협의가 쉽지 않고 또 영국의 면제품을 추운 화북 지방에 판매하기도 곤란하여 무역은 별로 개선되지 못하였다. 영국 공업상품의 중국수출이 이렇듯 부진한 것은 중국의 면포가 가내공업으로 싸고 질기기 때문에 영국면포에 저항할 수 있었다는 점과 또 당시 청의 사회경제 구조는 자급자족 상태에 있었기 때문에 영국 상품이 추운 화북으로까지 올라가지 못하였다. 이에 영국은 어떤 구실을 잡더라도 남경조약의 개정을 단행하려 하였다. 기회를 노리고 있던 영국은 1856년 광주에서 청의 관리가 중국인 소유의 배 애로우호에 올라가서 승무원 12명을 해적혐의로 연행하고 영국 국기를 내린 단순한 사건을 문제 삼았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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