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후기 노소 당론의 성격
- 최초 등록일
- 2012.03.18
- 최종 저작일
- 2012.02
- 22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2,500원
소개글
정말 잘 적었습니다.
목차
1. 서론
2. 백호(白湖) 윤휴(尹鑴)의 학설사정(學說邪正)
3. 회니논쟁(懷尼論爭)과 신임의리론(辛壬義理論)
4. 건국사관(建國史觀)에 대한 인식의 차이
5. 결론
본문내용
I. 서론
조선 후기 당쟁사의 핵심은 노소당쟁(老少黨爭)이었다. 그런데 노소당론의 논점과 명분을 분석, 재평가하면 해석 여하에 따라서 큰 의미를 갖지 못하는 것도 있고, 현대적 시각에서는 시비 자체가 성립될 수 있는 것인지 납득하기 어려운 측면도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우리가 노소당쟁을 바르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기본적으로 이러한 당쟁을 가능하게 하였던 시대적 배경을 시야에 넣고 접근해야 할 필요가 있다.
조선 후기는 안팎의 정치?사회?경제적 변동에 따라 주자학적 명분론체제의 변혁을 요구하는 상황이었다. 안으로는 특히 양란 이후에 심각한 경제적?신분적 와해 현상과 이에 따른 구체제적인 가치관의 동요, 하층민들의 사회적?정치적 상승현상으로 현실 대응의 탄력 있는 개혁정책이 절실하였다. 한편 밖으로는 중국 대륙의 정치적 동요가 조선 사회에 크나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중화체제의 붕괴라는 현실 앞에서 조선에 그 중화를 세우려고 했던 입장과 중화체제의 붕괴가 곧 다가올 것을 인정하여 대명의리론을 포기하고 청의 경우와 같이 새로운 질서를 구축해 나아가려는 입장이 나뉘고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주자학의 이념과 숭명북벌(崇明北伐)의 의리론(義理論)으로 경직되었던 서인의 집권은 의리명분적 요인이 사회경제적 요인보다 조선사회에 더 큰 영향력을 가지게 하였다. 즉 이러한 상황의 극복 논리를 형이상학적 이기론(理氣論)이나 의식화된 예론(禮論), 그리고 춘추의리(春秋義理)의 명분론을 강조하여 체제 이완에 대처하면서 집권 기반의 강화와 세도 확립의 정도를 내세우게 되었다. 이와 같은 정치적 기류는 주자학적 권위를 빌어 여타 학문과 사상을 압박하였고 나아가 시대 변천에 순응한 사회개혁론을 배제하였던 것이다.
이 글에서는 위와 같은 조선 후기의 시대적 배경 속에서 전개된 노?소 당론의 전개를 살펴보고 그 역사적 의미를 논해보고자 한다.
II. 백호(白湖) 윤휴(尹?)의 학설사정(學說邪正)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