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인화에 끼친 조맹부와 원말사대가의 영향력과 현시대의 우리의 자세 비판
- 최초 등록일
- 2011.11.13
- 최종 저작일
- 20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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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문인화에 끼친 조맹부와 원말사대가의 영향력과 현시대의 우리의 자세 비판
목차
Ⅰ. 머리말
Ⅱ. 槪觀
Ⅲ. 조맹부와 원사대가 약력
1.조맹부
2.황공망
3.오 진
4.왕 몽
5.예 찬
Ⅳ. 작가의 작품의 배경과 나타내고자 하는 것
Ⅴ. 小考
Ⅵ. 맺음말
본문내용
Ⅱ. 槪觀 [개관]
주맹부는 원대 문인화의 부흥을 주도하였는데 그는 서화에 모두 뛰어났으며 고관이었던 사대부였기 때문에 원대는 물론이고 후세에 미쳤던 영향력은 절대적이었다. 그는 남송의 원체화와 송 말 이래의 조방한 수묵화를 배척하고 북송 이전의 화풍으로 복귀할 것을 주장했으며 이 주장을 실천했다. 이와 같은 지도자들이 늘 그러하듯이 그는 창작은 다각적이며 종합적인 입장을 취했던 것으로 보인다.
원 사대가로 불리는 황공망, 예찬, 오진, 왕몽 이들 네사람은 원대 중ㆍ후기에 절강(絶江) 일대에서 생활하면서 산수화에 탁월한 성취를 이룬 문인화가 이다. 그들은 강남의 산천풍물을 그리면서 각기 다른 예술 세계를 형성하였으며, 수묵산수화에 능하고 대나무와 바위를 잘 그렸다. 그들은 원말기의 사회적 혼란의 시대에 살았고 개인의 사회적 지위와 생활환경은 서로 달랐지만 모두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직간접적으로 조맹부 예술의 영향을 받았으며 회화작품으로 그들의 심경과 생활정취를 선명하게 표현하였다. 원말사대가는 사상적으로 모두 원대 귀족 통치 계층과 떨어져 있었고, 예술적으로는 자족과 안일함을 솔선하여 이끌었으며, 한층 성숙된 문인화(文人畵) 를 보여주었다.
원사대가는 동거에 사숙해서 남종화의 기초를 열고 명ㆍ청대 문인산수화에 끊임없는 원천이 되었다. 황공망의 ‘창고’, 오진의 ‘심요’, 왕몽의 ‘수윤’, 예찬의 ‘간원’ 이라는 말로 평해지는 것처럼 이들은 각자가 개성적인 특색을 갖고 있는데 솔직한 시정의 표출을 산수표현에서 구하고 원체 산수화의 변각구도나 수묵화의 준법을 택하지 않고 북송풍의 대환적 구도법에 따라 중첩되고 서로 엉키며 부드럽고 엷은 선묘를 사용해 산수를 그렸다. 갈필의 새로운 선묘법이지만 이것은 필선에 의한 묘사라고 하는 전통에의 복귀를 의미한다.
Ⅲ. 조맹부와 원사대가 약력(略歷)
1. 조맹부 [趙孟頫, 1254~1322]
조맹부는 송(宋)나라 종실 출신이며, 원나라 세조(世祖)에 발탁된 뒤 역대 황제를 섬겼고, 벼슬은 한림학사승지 •영록대부(榮祿大夫)에 이르렀다. 죽은 뒤에 위국공(魏國公)에 추봉되었다. 송나라 태조의 후손이면서도 원나라를 섬겨 영달하였으므로, 후세에 명분상의 비난을 면하지 못하였다.
참고 자료
장준석 [중국 회화사론]
최병식 [중국회화사론]
마츠바라 사브로/ 최성은, 김원동, 한정희 등 역 [동양미술사]
북경 중앙미술학원 중국미술사교연실 편저(박은화 역) [간추린 중국미술의 역사]
등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