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말의 세도정치 및 쇄국과 개항
- 최초 등록일
- 2011.10.31
- 최종 저작일
- 20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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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말의 세도정치와 흥선대원군의 쇄국정책 및 개화사상
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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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영·정조시기 탕평책을 통한 인재의 고른 등용, 실학자들의 활약으로 실학사상이 정책에 반영
되며, 정계가 어느정도 안정을 찾고, 대동법과 균역법, 금속화폐의 유통 등 사회적 발전이 있
었고, 수원성 축조 등 과학발전과 민생도 안정 되었다. 하지만 잠시 정조의 즉위 초기에 정조
의 즉위를 도운 홍국영(洪國榮)이 정조가 뒤에서 인재를 양성하고 힘을 기르던 사이에 세도
정치를 하던 시기가 있기도 했다. 정조가 홍국을 내쫓고, 다시 국정을 안정켰으나, 1800년
48세의 나이로 죽자, 11세의 순조(純祖: 1800~1834)가 왕위에 오르자 외척세력이 발호하여
세도정치가 시작 되었다. 순조 초에는 안동김씨의 김조순(金祖淳)이 왕실의 외척이 되어 세도
를 하였고, 순조의 뒤를 이어 헌종(憲宗: 1834~1849)이 즉위하자, 정권은 김조순의 아들
김좌근(金左根)에게로 넘어간다. 그 중간에 잠시 정권이 헌종의 어머니의 가문인 풍양조씨가
잠시 정권을 잡기도 하나, 헌종비를 안동김가에서 냄으로써, 안동김씨에게로 다시 넘어간다.
헌종의 다음 왕인 철종(哲宗: 1849~1863)이 즉위한 후에도 안동김씨의 김문근(金汶根)의
딸이 왕비가 되어 안동김씨의 세도는 기세를 더했다. 이들 세도가문은 견제세력이 존재하지
않았는데, 다른 양반들은 물론 왕이나 왕족도 그들과 대립하지 못하여서 백성들에 대한 수탈
은 한층 더 강화되었다. 그리고 매관매직을 통해 관직에 오른 자들 또한 백성들을 착취하였
다. 이로 인해 전정(田政), 군정(軍政), 환곡(還穀) 등 3정(三政)의 문란이 극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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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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