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멸망과 고려의 건국
- 최초 등록일
- 2011.10.25
- 최종 저작일
- 201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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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신라말의 사회, 정치적 혼란과 후백제의 탄생과 고려의 재통일
목차
(1) 신라 말기의 사회상황
(2) 후삼국의 성립
(3) 고려의 건국과 후삼국 통일
본문내용
그리고 신라에도 우호적인 태도를 취해 신라에
침입한 후백제군을 물리치기도 했다. 결국 935년 신라 경순왕이 고려에 나라를 바치는 결과
를 낳았다. 그런가하면 백성들에 대해 조세부담을 줄이고, 빈민구제기관인 흑창(黑倉)을 설치
해 가난한 백성들을 돌보기도 했으며, 억울하게 노비가 된 자를 구제해 주기도 했다.
이제 왕건의 고려와 견훤의 후백제 간 쟁패(爭覇)를 살펴 보면, 먼저, 왕건이 즉위한 초기에
양국은 우호적인 관계였다. 견훤은 왕건이 즉위하자 선물을 보내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둘 간
에 틈이 벌어지기 시작한 시기는 920년 견훤이 신라의 합천(陜川)과 초계(草溪) 등을 공격
하고 신라의 구원요청에 고려가 응하면서부터이다. 이 후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다가 927년
왕건이 용주(龍主)를 공격하며, 다시 대립하기 시작했다. 그 해 견훤은 신라의 경주로 쳐
들어 가 경애왕을 살해했고, 이를 구원하러 간 왕건은 공산전투(空山戰鬪)에서 견훤에 대패해
신숭겸(申崇謙), 김락(金樂) 등 장수들을 잃고 간신히 몸만 빠져 나오는 신세에 쳐했다. 이 후
전열을 정비하여, 930년 고창군전투(古昌郡戰鬪)에서 견훤군을 크게 물리쳐 승기를 잡았고,
이 후 아들에게 쫓겨난 견훤과 신라 경순왕의 귀부로 세를 늘려 신검과 일이천(一利川)에서
결전을 벌였고 패한 신검은 황산군(黃酸郡)으로 달아나 다시 싸웠으나, 왕건이 승리를 거둠
으로써, 후삼국을 통일하였다. 왕건은 난세에 적을 아우를 수 있는 포용력과 날 때와 들 때를
아는 신중함과 인내심 그리고 결단력까지 두루 갖춘 군주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덕치
(德治)를 통한 민심의 수습과 애민정신(愛民精神)으로, 후삼국 통일의 대업을 달성할 수 있었다. 이에 호족과 농민 등도 자발적으로 새로운 사회 건설에 참여함으로써, 고려시대에는
폐쇄적인 신라의 골품제보다 상위층으로 갈 수 있는 기회가 확대 되었다. 이는 호족의 후신인
향리(鄕吏)나 일반백성도 명경과(明經科) 이하의 과거에 응시할 수 있었던 변화가 일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