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 `삼국유사의 간행과 유통`을 읽고
- 최초 등록일
- 2011.08.28
- 최종 저작일
- 201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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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삼국유사에 관련된 논문을 읽고 요약한 후, 개인적 견해과 감상을 덧붙인 글입니다.
목차
없음
본문내용
『삼국유사』의 간행과 유통에 관련하여 단연 화두가 되는 것은 초간판을 간행한 사람이 누구인가이다. 유사 자체나 다른 자료에 초간의 시기를 명확하게 알려주는 기록이 없어 학설의 대립이 있다. 고교형이 유사에 있는 무극의 보족기사 무극은 가지산문도이자 일연과 마음이 맞는 제자로, 충렬왕대부터 충선왕·충숙왕대를 걸쳐 불교계를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노년(57)에는 중국에까지 그 명성이 떨쳤다.
를 근거로 들어 무극의 초간설을 주장한 이래 일인학자들 사이에 통설이 되었다.
유사에는 일연 생존 당시의 연대가 몇 번 나타나는데, 이 기록을 통해 유사의 탈고 및 초간시기에 대해 추론할 수 있다. 일연이 기록한 연대 기록은 충렬왕 7년(1281)으로 끝나고 있다. 특히 충렬왕 10년(1284) 국가적 대불사였던 국청사 금비에 불아를 봉안했던 법회에 관해 일연은 전혀 언급하고 있지 않다 불아를 중요시하여 그와 관련 사항은 되도록 세세히 기록하고 있는 일연의 태도와 맞지 않는다. 이 법회에 관련된 기록은 후에 무극에 의해 보각되어 정덕본에 남아있다.
. 이로 미루어 볼 때, 『삼국유사』의 탈고는 충렬왕 10년 이전에 이미 완성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권5 의 첫머리에는 『삼국유사』의 찬자와 그 직함이 명백하게 기록되어 있다.· 國尊曹溪宗迦智山下麟角寺住持圓鏡沖照大禪師一然撰
“인각사주지”운운의 직함은 일연이 인각사 인각사에 주석하기 시작했던 충렬왕 10년(1284)으로부터 그가 입적한 충렬왕 15년(1289)까지 초간을 하였다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이에 반하여, 유사에 무극이 부기한 부분 前後所將舍利」조의 말미에 첨가한 안설과 「眞表傳簡」조 아래에 부기한 「關東楓岳鉢淵藪石記」가 그것이다.
이 존재함을 들어 무극이 유사를 초간했다고 주장하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만일 무극이 초각을 했다고 본다면 그 스승인 일연의 익호인 보각을 그 직함에 기록하지 않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무극은 자신이 부기한 부분에 『무극기』라고 표시하여 일연이 저술한 원문과 구별을 두었다. 또한 일연이 각별한 관심과 노력을 들였다는 점까지 고려하면 유사의 초간은 일연의 생존 시에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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