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은 이색
- 최초 등록일
- 2010.08.09
- 최종 저작일
- 2010.03
- 3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500원
소개글
목은 이색
목차
▶ 들어가며
▶ 문학관, 세계관과 사상
▶ 시세계의 특징
▶ 나오며
본문내용
▶ 들어가며
이색의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영숙(潁叔)으로 1328년(충숙왕 15) 영해(寧海)의 외가에서 출생하였다. 조부 이자성(李自成)은 한산군리(韓山郡吏)에 불과했으나 아버지 가정(稼亭) 이곡(李穀)이 고려와 원의 과거에 합격, 중앙 정계에 진출함으로써 그의 가문은 두각을 나타내게 된다. 여러 산사를 옮겨가며 독서에 전념하던 이색은 14세가 되어 비로소 시 짓는 법을 배우고 성균시 십운시과에 응시해 진사가 된다. 그 후 한동안 성균관의 구재도회(九齋都會)에서 과거를 준비하던 이색에게 생애의 중요한 전기가 찾아온다. 20세가 되던 해 연경에 체류 중인 부친을 뵈러 갔다가 원의 국자감에 입학, 한층 넓고 새로운 학문의 지평에 들어서게 된 것이다. 역학으로 이름난 우문자정(宇文子貞)에게 주역을 배우는 등 당대의 석학들로부터 수준 높은 학문을 전수 받았는데, 그 가운데 특히 이름난 고문가이자 경사백가(經史百家)에 통달한 노학자 규재(圭齋) 구양현(歐陽玄)은 “나의 학문의 전통이 해외로 나가서 그대에게 전술될 것이다”라 하며 이색에게 학통을 전해 주었다.
이색의 유학생활은 두 가지 측면에서 중요한 의의를 지니고 있다. 첫째는 국내 학술 사상의 발전에 영향을 끼쳤다는 점이다. 안향에 의해 수입된 신유학을 본격적인 학술의 차원으로 끌어올리고 이를 확산시킬 수 있었던 기본 역량을 쌓을 수 있었던 것이다. 두 번째는 민족적 각성을 이루는 계기가 되었다는 점이다. 대원제국의 수도에 체류하면서 그의 세계인식과 문명의식은 일국적 영역을 벗어나 확장될 수 있었으며, 이로부터 국제관계속에서 고려의 위상을 객관적으로 확인하는 기회를 갖게 된 것이다.
▶ 문학관, 세계관과 사상
이색은 여말 문단의 영수로 활약하면서 사대부 문학의 진로를 제시하였다. 성리학의 수용과 더불어 도(道)와 문(文)의 상관관계가 본격적으로 문제시되기 시작했지만 사장(詞章)위주의 창작풍토는 뿌리 깊은 것이었다. 이제현은 ‘조충전각지도(彫蟲篆刻之徒)’라는 이름으로 사장에 몰두하는 이들을 매도했으나 과거고시는 여전히 사장의 숙달을 요구하였고 치열한 신분경쟁과 물질경쟁의 와중에 있던 사계층은 이에 호응해 출세의 길에 나서고자 하였다. 그런 실태를 파악한 이곡은 문풍이 진작되지 않는 이유가 공리(功利)를 우선시하고 교화(敎化)를 등한시한 때문이라 진단한 바 있기도 하다. 역시 동일한 시각에서 문단의 병리현상을 파악하고 있는 이색은 학문의 기본자세를 재점검하는 한편 심성수양을 기본으로 삼고 궁극적으로는 도의 실현을 목표로 하는 문학을 기획하게 된 것이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