첨성대 에세이
- 최초 등록일
- 2010.06.16
- 최종 저작일
- 20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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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첨성대 에세이입니다.
레포트 작성에 도움이 되었으면 합니다.
목차
1. 서론
2. 본론
3. 결론
본문내용
1. 서론
경주시 인왕동 신라의 옛 궁성인 반월성 서북쪽 평지에 위치한 첨성대. 국보 제31호, 높이 약9m, 재료는 화강암으로 선덕여왕의 치세 기간에 세워졌다. 땅 위로 솟은 우아한 우물 모양을 하고 있는 첨성대는 오래 전부터 고대 신라의 천문대로 알려져 있으나, 지구상에서 그 비슷한 형태를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신비에 쌓인 유물이다. 그러나 천문대의 외형과 구조 때문에 천문 관측대가 맞는지에 대한 의문이 끊임없이 제기되고 있다. 그렇다면 왜 첨성대의 구조가 천문 관측대로는 부적합하다는 의문이 끊이질 않는 것일까.
천문대의 구조는 정말 천문을 관측하는 데 부적합할까? 적어도 현대 천문학자들의 관측 방식과 활동에 견주어 비교해 보면 첨성대의 구조는 관측 활동을 하기에는 불편한 점이 많다. 보통 첨성대에서의 관측활동은 다음과 같이 진행되었을 것으로 본다. 먼저 원통부의 중간에 남쪽으로 난 창문에 사다리를 걸치고 내부로 들어가고, 다시 자연석 그대로 울퉁불퉁한 내부에서 암벽타기 하듯이 기어 올라가거나 아니면 작은 사다리를 놓고 상단부로 올라가, 한 변이 2.2m 되는 1.5평 공간에서 관측 활동을 하는 것이 결코 힘들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관측 활동을 하기에 최적의 구조가 아님은 분명하다. 상시적으로 관측 활동을 해야 하는 천문대라면 최적의 구조여야 하기 때문이다. 첨성대의 구조는 현대적 관점에서 천문 관측 활동을 하기에 편리한 구조는 분명 아니다.
첨성대의 기능에 대한 서술이 처음 나타나는 문헌은 15세기 말의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1481~1499)이다. 이 기록은 『세종실록지리지』의 기록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천문을 물었다(以候天文)”는 문구만을 덧붙였다. 이후 많은 역사 기록들은 『신증동국여지승람』의 이 기록을 인용해서 첨성대에서 “천문을 물었다”고 적고 있다. 18세기 중엽의 『동사강목(東史綱目)』(1758)에는 이와 유사한 서술이 담겨 있는데, 신라의 첨성대에서 “천문을 묻고, 요사한 기운을 살폈다”고 되어 있다.
근대인으로서 첨성대를 처음으로 천문대로 규정한 사람은 일찍이 일제 강점기인 1910년대에 한국에서 활동하던 일본인 기상학자 와다 유지였다. 와다 유지는 첨성대 위에 목조 구조물을 세우고 천문 관측 기구인 혼천의를 가설해 상시적으로 천문 관측을 했을 것이라며 현존하는 동양 최고의 천문대라고 그 과학적 가치를 높게 평가했다.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첨성대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일부 역사학자와 과학사학자들의 새로운 이견에도 불구하고 정설로 되어 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