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세개의 생애와 역사적 의의 및 평가
- 최초 등록일
- 2010.05.25
- 최종 저작일
- 20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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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원세개는 부정적으로 평가받기 일쑤입니다.
저는 긍정적으로 생각했기 때문에 원세개의 긍정적인 평가를 내렸습니다.
A+ 받은 레포트 입니다.
목차
1.원세개의 일생
2.원세개의 역사적 의의 및 감상
3.참고자료 및 참고문헌
본문내용
1.원세개의 일생
1859년 허난성(河南省)에서 태어난 그의 부친은 원보중이었으나 삼촌인 원보경이 아들이 없어 그의 양자가 되었다. 두 차례 향시에 떨어진 후 1881년 삼촌의 추천으로 이홍장(李鴻章)의 참모인 우창칭(吳長慶) 휘하 장교가 된다. 1882년 조선에서 임오군란이 일어나고, 조선 정부의 공식적 요청도 없는 상황에서 친청 세력인 명성황후의 주도하에 청나라에 구원 요청에 따라 청나라가 군사개입을 결정했고 이홍장의 천거로 한성 방위 책임자(청을 대표하는 외교수장은 아니었으며, 떠나기 전까지도 수장이 아닌 외교를 담당하던 북양대신의 파견원의 신분)로 머물렀다. 게다가 1884년 일본의 후원을 받은 개화파들이 일으킨 갑신정변을 진압하는 데 수완을 발휘했다. 이런 공로를 인정받아 조선 주재 총리교섭통상대신(조선 현지의 책임자 자리)이란 직위로 1894년 청일전쟁 직전까지 속국의 내정에 사사건건 간섭하면서 사실상의 총독행세를 했다. 당시 청나라의 한반도정책은 조선문제 최고책임자인 이홍장(1823~1901년)과 현지 책임자인 원세개의 협력으로 전개된 것이었다. 청나라의 내정·외교의 대권을 장악한 이홍장의 후원 하에서 원세개는 불도저식 한반도 정책으로 이홍장의 신임을 축적해 갔다. 그는 평소에 조선 국왕에게 제대로 인사도 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조-러 밀약사건을 빌미로 고종 폐위를 도모하였으며 화교 상인들의 활동을 적극 보호하는 등 청나라의 영향력을 조선에 이식하기 위하여 온갖 심혈을 기울였다. 이때부터 위안스카이는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는데, 그는 조선의 내정·외교를 조정·간섭하고 청나라 세력을 뿌리박게 하는 동시에 일본, 러시아 세력과 경쟁하였다. 그러나 1894년 청일전쟁 발발 며칠 전에 원세개는 자신을 엄습하는 무거운 중압감을 견디다 못해 부하인 당소의(唐紹儀)에게 책임을 떠넘긴 채 본국으로 도주하고 말았다. 패전이 불을 보듯 뻔한 상황에서 일단 자신의 신변부터 챙기고 본 것이다.
참고 자료
1.위안스카이 - 위키 백과
2.신해혁명과 중국근대화 키쿠치 타카하루 저
3.의화단 운동 전후의 산동 이은자 저
4.중화민국사 요코야마 히료야키 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