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과유성룡
- 최초 등록일
- 2010.05.04
- 최종 저작일
- 201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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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이순신과 유성룡의 생애와 업적 그리고 둘의 관계와 징비록에 관한 글입니다.
목차
이순신의 생애
유성룡의 생애
이순신과 유성룡의 관계
본문내용
이순신의 생애
충무공 이순신은 1545년 3월8일에 한양 건천동에서 4남중 3남으로 출생하였습니다. 이순신의 이름은 그의 어머니가 지어주셨는데 그 의미는 시할아버지의 이거(据)의 선몽을 받아 순(舜), 여기에 임금의 신하라는 뜻으로 신(臣)이라 짓고, 자(字)를 여해(汝諧)라 불렀습니다. 1565년에는 21세의 나이로 보성 군수를 지낸 방진의 딸과 결혼하였고, 그 다음해인 1566년부터 무예수련을 시작하였습니다. 1572년에 훈련원 별과시험에 낙방하였지만 1576년 32세의 나이로 2월에 식년무과에 합격하였고 12월에 함경도 동구비보의 권관이 되었습니다.이순신은 동구비보에서 3년동안 이선근무를 훌륭히 마치고 1579년 35세의 나이로 한양 훈련원의 봉사(종8품)로 승진하여 8개월을 봉직한 이순신은 그해 겨울 충청병사의 군관이 되어 충청도 해미로 갔습니다. 군관으로 9개월 해미에 머물다가 1580년 36세 7월에 만호(종4품. 한 진을 지휘하는 책임 무관)로 승진되어 발포로 가 전라좌수영 발포의 수군만호가 되었습니다. 일개 병상 군관이었던 이순신이 분경(음성적 뇌물 상납)하지 않고 만호로 임명된 것에는 당시 승지였던 유성룡의 천거가 있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발포에서 갖은 어려움을 잘 극복해나갔지만 군기경차관(임시 검열관)으로 파견나온 서익의 과거의 앙갚음에 대한 거짓보고로 1582년 발포 수군만호 파직을 당했습니다. 유성룡에 도움으로 이듬해 5월 훈련원 봉사로 복직하였습니다. 1583년 7월, 병사(兵使) 이용은 조정에 특청을 넣어 이순신은 함경도 남병사의 군관이 되었습니다. 그해 10월 병사(兵使)가 바뀌어 이순신은 함경도 건원보의 군관이 되어 오랑캐 괴수를 사로 잡았습니다. 그리고 다음달인 11월 그의 부친이 별세하였습니다. 하지만 교통이 불편한 시절이라 이듬해 1월에야 부친의 부음을 듣고 아산 집에 당도하였고 삼년상을 마치고 이순신이 42세가 되던 그해 1월, 사복시 주부(종6품)가 되었다가, 16일 만에 다시 여진족이 침략을 막아내기 위해 함경도 경흥 고을의 조산보 만호(종4품)로 승진되어갔습니다. 1587년 8월에는 녹둔도 둔전관 겸임을 했으며 8월에는 곡물을 탈취하기위해 쳐들어왔던 여진족을 격퇴하였지만 파직되어 백의종군하였습니다. 1588년 1월 시전 부락 공격작전에 공을 세워 백의종군에서 풀려났습니다. 1589년에 초에는 전라감사 이관의 군관이 되었다가 12월 정읍현감(종6품)이 되었고 정읍에서 북쪽 30리쯤에있는 태인의 현감을 겸임했습니다
참고 자료
-여해 이순신|김종대 지음|예담
-설득과 통합의 리더 유성룡|이덕일 지음|역사의아침
-징비록|김문수 엮음|돋을새김
http://academic.naver.com/view.nhn?doc_id=7986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