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의 감옥제도 및 고려시대의 감옥제도
- 최초 등록일
- 2010.03.20
- 최종 저작일
- 201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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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고대의 감옥제도 및 고려시대의 감옥제도
목차
고 대 시 대
1.서론
2.본론
(1)부여의 감옥제도
(2)고구려의 감옥제도
(3)신라의 감옥제도
(4)백제의 감옥제도
3.결론
고 려 시 대
1.서론
2.본론
.중앙의 감옥 설치와 운영체제
1)궁성의 감옥
2)형부의 감옥
3)개경 치안기구의 감옥
4)도역형도(徒役刑徒)의 수감 시설
외방 감옥의 설치실태와 운영체제
본문내용
1. 서 론
감옥은 권력의 발생, 국가의 성립과 더불어 존재하기 시작했다. 범죄를 저지른 자 또는 범죄를 저질렀다는 혐의가 있는 자를 가두는 장소인 감옥은 국가권력이 실질적으로 발현되는 장소였다. 뿐만 아니라 감옥은 민들에게 그들의 생활을 보호하고 안녕을 유지시키며 사회질서가 유지되고 있다는 것, 다시 말해 국가의 기능이 정상적으로 수행되고 있다는 것을 가장 직접적으로 보여주는 국가권력의 한 상징이기도 하였다.
2. 본 론
(1)부여의 감옥제도
우리 나라의 고대사회에 있어서 最初의 監獄에 대해서는 문헌상으로 고증할 수는 없다. 다만 後漢書에 의하면 부여는 목책을 둥글게 쌓아 성을 만들었으며, 궁실(宮室) 궁전 안에 있는 방
과 창고(倉庫) 및 뇌옥(牢獄) 죄인(罪人)을 가두어 두는 옥
이 있었다. 또한 삼국지에 의하면 부여사람은 정주생활 일정한 곳에 자리를 잡고 생활함
을 하였으며, 궁실과 창고 및 로옥을 가지고 있었다. 이상 두 책의 기록이 우리나라의 감옥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삼국지에 의하면 “부여의 성(城)은 모두 둥글게 만들어서 마치 뇌옥(牢獄)과 같았다” 고 하는데, 이에 미루어 중국의 감옥은 원형(圓形)이었음을 알 수 있을 뿐만아니라, 이상을 조합해 보면 부여에도 원형의 상설 감옥이 있었음을 추측 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후한서와 삼국지의 “부여에 감옥이 있었다”는 기록의 의미는 창고의 한 구석이나 또는 토굴 같은 곳을 필요에 따라 일시적인 구금의 장소로 이용하는 그런 시설이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감옥에 사용할 목적으로 특별히 설비된 일정한 시설과 관리기관이 있었음을 의미한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당시의 감옥은 오늘날의 자유형의 집행장소가 아니라 형사피의자와 형사피고인 및 사형인 등을 구금하는 단순한 구금장소(拘禁場所)에 불과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한편 삼국지에 의하면 부여는 음력 정월에 제천행사(祭天行事) 하늘에 제사를 지냄
를 하였는데, 이는 국중대회로서 연일 먹고 마시며 노래하고 춤 추었는 바 이를 영고(迎鼓)라 하였으며, 이때에는 형벌을 중단하고 죄수들을 풀어주었다고 한다.
참고 자료
고려시대 감옥(감옥)의 설치와 운영체계-박진훈 2003
삼국시대의 교정(행형)제도 연구 -이동명 호남대학교 인문사회과학연구소 199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