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정조대의 개혁정책
- 최초 등록일
- 2009.07.29
- 최종 저작일
- 20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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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영·정조대의 개혁정책에 대한자료입니다.
목차
영·정조대의 개혁정책
[1] 서론
[2] 영조의 개혁
1. 가계와 왕세제 책봉
2. 대리청정 문제와 노론·소론 대립
3. 영조의 왕권 강화 정책
1) 즉위 후의 탕평책-쌍거호대(雙擧互對)에서 유재시용(惟才是用)으로
2) 형률의 완화
3) 경제정책-균역법 시행
4) 사회정책-공사천법 마련, 서얼의 관리등용, 서원의 난립 금지
5) 국방정책
6) 문화진흥정책-「동국문헌비고」,「속오례의」,「속대전」,「무원록」 등 문물 재정비
[3] 정조의 개혁
1. 정조연간의 정국운영과 탕평론
2. 정조의 왕권 강화책
1) 탕평책의 계승
2) 규장각의 설치
3) 장용영의 설치
4) 화성 신도시 건설과 장헌세자에 대한 예우
5)중인문화의 장려와 문예부흥
[4] 결론
[5] 참고문헌
본문내용
영·정조대의 개혁정책
[1] 서론
최근에 많이 방영된 사극에 의해 일반인들이 갖게 된 조선에 대한 가장 위험한 선입견은 조선이 왕의 말 한마디에 의해 모든 것이 좌우되는 매우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한 강력한 전제군주통치사회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조선왕조실록이나 당시를 연구한 사서를 조금만 주의 깊게 읽어보아도 현대에 사는 누구도 조선시대의 왕이 되기를 거부할 것으로 생각할 정도로 왕권이 약했던 나라였다. 심지어 사신이 중국에 가서 왕이 약하고 신하가 강한 나라라고 말을 할 정도였다.
영·정조 연간의 개혁정책은 이미 일당독재로 흘러가기 시작한 노론에 대한 왕의 외로운 투쟁이라고 할 수 있다. 노론을 제외한 다른 세력, 즉 소론, 남인 등과 왕권이 결합하여 노론에 대항하는 형식의 권력이 투쟁한 탕평책이 핵심이다.
영조실록과 정조실록을 보면, 일반인들의 생각과는 달리 탕평책이 시행되는 과정에서 노론이 정권을 잃는 사태는 발생하지 않았음을 알게 된다. 영조는 즉위 자체가 불가능하였지만, 노론의 세력을 등에 업고 즉위할 수 있었고, 정조도 자신이 즉위하는 것은 어려웠지만, 노론의 암묵적인 지지에 의해 즉위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신하들이 세운 왕들이기에 이들은 왕실을 왕실로서 바라보지 않고, 수많은 사대부의 가문 중 하나의 가문으로 인식하였기에 왕실에서도 노론을 바라보는 시각이 우호적이지 않게 되었다.
탕평책과 두 군주의 개혁은 이러한 왕의 현실적인 필요성에 의해 세워진 정책이었다. 이 글에서는 18세기라는 한 세기 동안의 정치사의 중심인 탕평책과 그것의 본질과 성격 등을 규명하고 나아가 이를 토대로 18세기 영·정조 연간의 일연의 개혁정책에 대해 이해하고자 한다.
[2] 영조의 개혁
1. 가계와 왕세제 책봉
아버지는 숙종이고, 어머니는 화경숙빈(和敬淑嬪) 최씨(崔氏)이다. 비는 서종제(徐宗悌)의 딸 정성왕후(貞聖王后)이며, 계비는 김한구(金漢耉)의 딸 정순왕후(貞純王后)이다. 1699년(숙종 25) 연잉군에 봉하여지고, 1721년(경종 1)에 왕세제로 책봉되었다
참고 자료
박광용, 「영조와 정조의 나라」, 푸른 역사, 2000
김문식, 「정조시대의 사상과 문화」, 돌베개, 1999
편집부, 「실패한 개혁의 역사」, 역사비평사, 1997
이성무, 「조선시대 당쟁사2 (탕평과 세도정치 : 숙종조 ~ 고종조)」, 동방미디어, 2000
이덕일, 「살아있는 한국사3 (사림의 등장에서 대한제국의 멸망까지)」, 휴머니스트,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