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서원
- 최초 등록일
- 2009.06.09
- 최종 저작일
- 20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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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조선시대 서원의 전반적인 것에 대한 레포트입니다.
목차
1. 서원의 설립과 남설, 철폐
2. 서원의 기능
3. 서원의 정치ㆍ사회적 성격
4. 서원의 경제 기반
5. 서원전의 구성과 운영
본문내용
1. 서원의 설립과 남설, 철폐
서원은 원래 중국 당(唐)말에 발생하여 송(宋)대에 크게 발전한 것으로, 조선에서의 서원은 1543년(중종 38년) 풍기군수 주세붕의 주도로 설립된 백운동 서원이 최초이다. 이 시기의 조선사회는 관학의 쇠퇴와 주자숭배사상의 만연, 사화(士禍) 등으로 인해 유림들이 향촌에 은둔생활을 많이 하던 시기였다. 지방으로 내려간 이들은 산발적으로 서당, 정사(精舍) 등을 세워 교육을 하다가, 하나의 집합소로 통합될 필요에 따라 중국의 서원과 같은 것을 요구하게 되었다. 이런 즈음에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이 안향의 사묘(詞廟)를 백운동의 숙수사(宿水寺) 터에 세운 후, 이듬해 그 앞에 서원을 건립하였고, 1175년(명종 5년) 풍기군수였던 이황의 요청으로 “소수(紹修)”라는 사액을 받아 백운동 서원은 최초의 사액서원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백운동 서원은 국가의 공인을 받은 사설교육기관으로 독자적인 활동을 허락 받게 되었고, 새로운 향촌기구로서 주목을 받았다. 사액을 받아 면세, 면역의 특전과 함께 공인된 교육기관으로 자치적인 활동도 허용되었음은 물론, 촌민들에게 존경의 대상이 되었고, 지방관으로부터는 대우도 받았다. 또한 서원은 사림들이 향촌 내 지배계급으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하려는 목적과, 성리학에 대한 관심을 충족시켜보려는 목적 속에서 나날이 설립되어 갔다.
17세기 이후 서원은 당쟁의 배후기지로도 활용되어서 당색과 양반들의 이해관계가 결합하여 곳곳에서 남설(濫設)되고 사액이 내려졌다. 서원은 보통 선현의 연고지를 따라서 건립되었는데, 후손, 문인, 향인들이 따로따로 세우는 것이 아니고 대게 서로 힘을 합쳐 세우는 형식이었다. 이렇게 설립한 서원은 제향인의 후손들이 동족의 결합과 유대를 도모하는 장소이자, 제향인(祭享人)으로 대표되는 당색의 근거지, 또한 지방양반들의 향촌 활동의 중심지의 기능을 수행하며, 전체적으로 양반의 기득권 유지에 불가결한 요소로 작용하였다. 하지만 세워지는 서원의 개수가 증가하면서, 관학인 향교의 등한시, 서원의 면역과 면세의 권리로 인한 국가경제의 혼란, 관아의 제수지급의 과다, 당쟁의 심화 등 폐단들이 속속 드러났다. 결국 효종 8년에 “정유성명(丁酉成命)”이라 하여 서원 건립 시 조정의 허락을 받는 절차가 만들어지게 되었고, 이후 현종 원년의 “경자성명(庚子成命) 서원에 내리는 사액을 제한하는 조치.
”, 숙종 40년의 “갑오정식(甲午定式) 보고하지 않고 세운 서원들을 하나씩 심의하여 철회(撤毁)를 결정하는 조치.
”이 계속해서 실시되었다.
참고 자료
윤희면, 「조선시대 서원과 양반」, 집문당, 2004
김학수, 「영남지역 서원의 정치사회적 성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