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3년 상을 치르고 사마천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태사령이 된다. 태사령이 된 사마천은 황실의 장서를 이용하여 역사서 편찬에 착수했다. ... 태사령이 된 후 사마담은 사관의 직책을 계승해야한다는 사명으로 아들 사마천 또한 사관으로 키우고자 하였다. ... 적어도 47살까지 사마천은 태사령으로 황제에게 신임을 받으면서 예찬하며 황금빛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자승부사’하였다고 누구나 태사령에 오를 수는 없었고, 태사령이라고 해서 아무나 『사기』와 같은 위대한 역사서를 저술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 저자의 분석처럼 사마천이 『사기』를 집필한 데는 극적인 요소도 영향을 미쳤겠지만, 사마천이 태사령 직위를 계승할 수 있었던 현실적인 조건도 분명 영향을 미쳤음이 확실하다. ... 물론 저자는 율령이 보장한 전통으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자연스레 태사령이 되고, 아버지의 유업을 이어 그가 『사기』를 편찬한 것으로 사마천이 이룩한 ‘성일가지언’을 과소평가할 수는
왕이 신봉루(神鳳樓)3)로 가 구정(毬庭)에 금계기(金鷄旗)4)를 걸고 사면령을 내렸다 ... ●덕종 즉위년에 있었던 일 덕종은 즉위하자마자 서눌을 검교태사(檢校太師)로 임명하고 강감찬을 검교태사·시중(侍中)으로 임명했했습니다 서눌을 검교태사(檢校太師)로 임명했던 일을 비롯하여 ... 강감찬(姜邯贊)을 검교태사·시중(侍中)으로 임명했다. 을유일.?서여진의 영새대장군(寧塞大將軍) 아지대(阿志大) 등 27명이 와서 좋은 말을 바쳤다. 을미일.?
『사기』 명칭의 유래 『사기』의 저자인 사마천 자신은 「태사공서(太史公書)」라고 명명했는데, 이는 ‘태사령(太史令) 사마천의 저서’라는 뜻이다. ... 당시 역사를 기록하는 관직이었던 태사령(太史令)은 그다지 높은 벼슬이 아니었으나 사마천은 자신의 직분과 가계의 뿌리에 대해 대단한 자긍심을 가지고 있었다. ... 기원전 110년, 당시 태사령이었던 사마친의 부친인 사마담은 병이 생겨 죽게 되었다. 사마천은 부친이 위독하다는 전갈을 받고 낙양으로 돌아왔다.
특히 사마담은 이 일을 아주 중요하게 여겨서 태사의 직책을 누구보다도 열심히 맡았고 그 결과 태사령이라는 더 높은 직책을 맡게 되었다. ... 그래서 사마담은 태사령의 일도 하되 본질적으로는 역사를 쓰는 것에 매진하겠다라는 생각과 함께 역사책에 들어갈 자료를 모은다. ... 그 뒤에 사마천은 아버지의 유언을 잊지 않고 38세에 태사령이 되어서 역사책을 쓰기위해 왕실도서를 읽으며 역사책에 쓸 자료를 하나하나 모으고 있었다.
문종 37년 7월 순종(順宗)이 즉위하자 수태사(守太師) 겸 중서령(中書令)으로 승진했다. ... 헌종(獻宗)이 즉위하자 수태사(守太師)3) ? ... 겸 상서령(尙書令)으로 올랐으며, 이듬해 8월에는 중서령(中書令)이 되었다. 10월 기사일 헌종이 선위한다는 분부를 내리자, 재삼 사양하다가 경오일에 중광전(重光殿)4) 에서 즉위하였다
사마천은 사마담이 세상을 떠난 후 3년 뒤 아버지의 뒤를 이어 태사령에 임명된다. ... 그런데 내가 태사령이란 자리에 있으면서도 그것을 기록으로 남기지 못해 천하의 역사를 폐기하기에 이르렀구나. 나는 이것이 너무나 두렵다. ... 사마담은 태사령이라는 직책을 맡았는데, 관직에 있는 몸으로서 따로 시간을 내기 힘들었고 자신이 원하는 역사 기록을 하기에 문서들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자승부사’하였다고 사들이 모두 태사령에 오를 수는 없었고, 태사령이라고 아무나 사기와 같은 위대한 역사서를 저술할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또 이대에 걸쳐 저술되었다고 모두 일가의 ...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마담이 병사하며 태사령 직을 퇴임한 후에 그 아들 사마천이 3년 만에 태사령에 임명된 것은 실무 능력에 대한 소정의 검증 과정이 있었겠지만 이미 사율에서 제도적으로 ... 부친 사마담은 한 무제 시기에 태사령을 역임하였고 사마천도 부친의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태사령이 된 후 사마담은 사관의 직책을 계승해야한다는 사명으로 아들 사마천 또한 사관으로 키우고자 하였다. ... 사마천의 아버지 사마담은 한 무제 때 태사령을 지낸 사관으로서, 그의 집안은 대대로 사관을 배출한 가문이었다. ... 사마담은 기원전 138년 사마천이 여덟 살 되던 해 마침내 천문과 역법을 관장하고 황실 전적을 관리하는 태사령이 된다.
한(漢)의 조정에서 태사령(太史令)을 지낸 사마담의 아들 ? ... BC 110년, 사마담이 한무제의 노여움을 받아 죽자 상례기간이 지난 BC 108년, 아버지의 뒤를 이어 태사령이 됨 ? ... 훗날 다시 황실의 총애를 받아 중서령(中書令)이 됨 (2) 사기 ? 구성(연대순으로 정리하지 않음!)
그리고 3년 뒤 아버지의 유지를 충실히 받들어 사마천은 태사령이 되어서 사관의 기록과 석실, 금궤에 소장된 서적들을 묶어 다시 책으로 만들었던 것이다. ... 형을 받은 후 삼년 째 되던 해에 연호가 바뀌어(太始元年) 대사면령으로 옥중에서 석방된 사마천은 중서령에 임명되었고 사기의 집필을 계속할 수 있었다. ... 아버지의 유언을 정성껏 받들어 태사가 되고 학문의 깊이와 세상을 보는 견문을 넓히는 노력이 있었기에 사기열전이 완성될 수 있었던 것이다.
관직에도 올라 낭중직으로 제국의 서남지역에 파기되기도 하였으며, 부친이 죽자 제국의 태사령을 계승하기도 아였다. ... 생전 역사서 태사공서를 집필하였으며, 자신의 직무에 충실하면서도 부친의 유지를 이어 미증유의 통사집필에도 착수하였다. ... 이러한 이릉의 화가 사기의 완성에 어떠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 아주 구체적으로 논구하기는 사실 어려운 문제라 할 수 있는데, 이 사건에 사마천이 연루되지 않고 태사령직에 만일 줄곧 보임하고
일식(日食)이 발생하자 어사대(御史臺)에서, 춘관정(春官正) 유팽(柳彭)과 태사승(太史丞) 유득소(柳得韶)9) ? ... 현종 10년(1019) 기미년 12월 계미일에 태어나 같은 왕 13년 낙랑군(樂浪君)에 책봉되고 정종(靖宗) 3년(1037)에는 내사령(內史令)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사마천은 사관 집안에서 태어나 태사령 사마담의 영향으로 유학자 동중서에게 유학?교육을 받았다. 20대 초반에는 학문이 아닌 자료조사를 위해 답사의 시간도 보냈다. ... 바로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진정한 태사의 역할, 다시 말해서 역사책을 쓰는 사명을 완수하지 못한 것이 더 큰 문제였던 것이다. 그리고 사마천이 그 유언을 이어 받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