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화도감(禁火都監) 방화(防火)의 임무를 띤 관청. 나례도감(儺禮都監) 종묘에 제사지낼 때나 외국 사신의 영접, 기타의 경우에 나례를 행하기 위하여 임시로 두었던 관청. ... 관 청 명 해 설 가례도감(嘉禮都監) 왕의 성혼·즉위, 또는 왕세자·왕세손의 결혼·책봉 같은 일을 맏아본 임시 관청.
이 첫번째 일본 사신이 부산에 도착하였을 때 그들의 영접에 대한 가부와 서계(書契)의 서사(書辭)가 종래와 달리 오만하다 해서 문제가 되어 조정에서는 여러 진주성을 재차 공격해왔는데 ... 임진왜란을 계기로 종래 군사 제도의 허약함이 드러나자 월급을 주고 군인을 고용하는 군대인 훈련도감을 설치하고, 그 뒤 계속해서 어영청. 총융청. 금위영. ... 이와같이, 이 전란은 동아시아의 국제 정세를 크게 변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4) 임진왜란의 국제적 영향 1) 조 선 정치상에 있어서는 비변사가 강화되고 훈련도감을 비롯한 군사
원래 이 산대놀이는 중국의 사신을 영접할 때도 연희되었으며, 나례도감(儺禮都監) 후에 산대도감(山臺都監)에서 관장한 궁중 행사에도 동원되었다. ... 그러므로 '산대도감극', 또는 '산대놀이'라는 호칭은 한때 나례도감이나 산대도감에 속하고, '산대'라는 공의의 무대에서 놀던 호칭을 물려받은 것이지만, 공의로서의 뒷받침이 없어지고
국가원수 및 고위급 인사의 방문과 영접에 따른 외빈영접의전의 경우, 방문목적에 따라 국빈방문, 공식방문, 실무방문, 비공식 또는 사적방문 등 4가지로 구분한다. ... 등을 지냈고 조선초기에는 국조오례 같은 것을 정리하여 일상 속에서의 의례 등을 정리하였다. 1)의궤 그 당시에 의전행사 같은 것을 어떻게 했는지 글 등으로 상세하게 남겨놓은 것 2)도감 ... 즉, 국가의전은 외빈을 영접할 때 행하는 국가의 의전행사인 것이다.
원래 이 산대놀이는 중국의 사신을 영접할 때도 연희되었으며, 나례도감(儺禮都監) 후에 산대도감(山臺都監)에서 관장한 궁중 행사에도 동원되었다. ... 그러므로 '산대도감극', 또는 '산대놀이'라는 호칭은 한때 나례도감이나 산대도감에 속하고, '산대'라는 공의(公儀)의 무대에서 놀던 호칭을 물려받은 것이지만, 공의로서의 뒷받침이 없어지고 ... 현전하는 양주 별산대놀이의 내용은 산대도감 계통 극과 공통된 내용으로 조선조 서민문학(庶民文學)의 특성과 마찬가지로 파계승, 몰락한 양반, 무당(巫堂), 사당(寺堂), 하인(下人)
원래 이 산대놀이는 중국의 사신을 영접할 때도 연희되었으며, 나례도감(儺禮都監) 후에 산대도감(山臺都監)에서 관장한 궁중 행사에도 동원되었다. ... 연희의 내용은 산대도감 계통의 공통된 내용으로 남녀의 갈등, 양반에 대한 풍자?모욕, 서민생활의 빈곤상 등 당시의 현실 폭로와 특권계급에 대한 반항정신을 나타내는 것들이다. ... 그러므로 '산대도감극', 또는 '산대놀이'라는 호칭은 한때 나례도감이나 산 대도감에 속하고, '산대'라는 공의(公儀)의 무대에서 놀던 호칭을 물려받은 것이지 만, 공의로서의 뒷받침이
산대도감극은 도시형의 탈놀이로, 조선 궁중의 나례도감(儺禮都監)이나 산대도감의 관장 아래에서 산대라고 불린 무대에서 상연되던 때의 호칭에서 유래된 것이다. ... 또한, 원님의 생일이나 그 부임날같은 관아의 경사나 중국 사신을 영접하는 놀이로서도 특별히 연희되었다 한다. 1930년대 말까지도 연희되었으나 일제의 탄압으로 일시 중단되었다가 지금에
궁중음식이 기록 왕족의 경사시에 올린 진연례와 외국사신의 영접의례는 각각 진연도감, 영접도감이라는 전담관이 임시로 임명되어 의례 전반을 계획하고 실행하였으며 의례를 거행한 후에는 진연의궤 ... , 진작의궤, 진찬의궤, 영접의궤라는 기록을 남겼다. ... : 이른 아침의 초조반상, 아침 수랏상, 면상이나 다과상으로 차려지는 낮것상, 저녁 수랏상으로 이루어 졌다. (2) 연회식 : 왕족의 경사시에 차리는 진연상, 외국사신을 접대하는 영접상
최충렬이 또 건의하기를 “팔관회(八關會) 때에 관리들의 과상(果床)과 중금군(中禁軍)의 옷차림이 사치하여 제도에 바반되니 금지하기를 바랍혹 귀국 사신이 오더라도 매번 영접하기 어려울 ... 1331년(충혜왕 1)에는 위위시·소부시(小府寺, 소부감)에 다시 설치되었으며, 이 무렵 도첨의사사에서는 영도첨의(領都僉議)로 개칭되면서 폐지되었다. 1347년(충목왕 3)에는 정치도감
조선후기 1) 광대(廣大)와 재인(才人), 사당패(祠堂牌) - 중기 이후 나례도감(儺禮都監)이 그 명목을 잃어버린 후, 각 지방의 민속 가면극과 판소 리 등 기타 곡예놀이를 더욱 증진시켜 ... 잡극으로 나중에는 나례와는 별 상관 없이 영사 혹은 신감사 영접때나 연락환오(宴樂歡娛侍) 할 때는 언제나 행해지던 중요한 놀이였다. 2. 조선 중기 - 조선 중엽에는 임진? ... 그 후 역대의 왕들은 계동대나의(季冬大儺儀)는 물 론 천사(天使) 영접시와 부묘환궁시 종묘친제시 안태시(安泰侍), 내농작시(內農作侍),신 임감사 환영시, 연락환오시(宴樂歡娛侍)등 다양한
그러나 서울 근교의 산대놀이, 해서탈춤, 야류와 오광대는 산대도감계통극이다. ... 놀이꾼들은 궁중나례나 중국사신 영접시에 동원되던 전문적 놀이꾼. 2 황해도 탈춤: 海西탈춤이라 부름. ... 산대도감의 춤과 연기는 나례의 규식지희에서, 대사는 나례의 광대소학지희에서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데, 영·정조 이후 나희가 국가적인 행사로는 폐지되자 놀이꾼들이 지방으로 분산되어 각
이혜구는 「산대극과 기악」이라는 논문에서 백제인 미마지가 일본에 건너가서 그르친 기악은 남중국 오나라에서 백제에 들어와 지금까지 산대도감놀이로 전승되고 있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 많이 받았을 것이라 추측된다. (2) 오기(五伎) 오기는 금환, 월전, 대면, 속독, 산예 등으로 각각의 제목이 있으며 잡희(雜戱)를 수반하는 일종의 잡기 가면춤으로써 청국 사신을 영접할
특히 이러한 지역에 탈춤이 성행하게 된 까닭은 이곳이 주위 농산물의 집산지이고 사신 영접행사가 이루어지는 길목이기 때문이다. ... 등장하는 탈의 이름은 노장, 문둥이, 양반 초라니, 말뚝이 영노, 영감 할미, 마당쇠, 포수,홍백, 팔선녀 등이다 ) 봉산탈춤은 황해도 봉산에서 행해진 산대도감(山臺都監) 계통의 탈춤이다
하늘에 제사하고 인간의 힘으로 풀 수 없는 큰 문제에 당면했을 때 신의 힘을 빌려서 해결하려고 하였는데 그 중재의 역할을 맡은 것이 무당이었다, 무당은 신을 영접하기 위하여 굿판을 ... 조선 중기 이후, 영조 정조 조에 이르러 나례도감이 그 명목을 유지하지 못하게 되자 이에 예속되어 생활하고 놀았던 많은 창우, 광대들을 비롯한 가기와 재인들은 실질적인 생활의 터전을
황창무라는 칼춤은 칼춤을 빙자하여 백제의 왕을 죽였다는 황창랑의 용기와 충성심을 기려 그의모습을 본 딴 탈을 쓰고 놀았던 것이고 처용무는 나례때는 물론 궁중의연락이나 사신의 영접행사때에도 ... 왜란과 호란 후 나라 재정이 궁핍해 지자 놀이 풍속은 조금 위축되었지만 양대도감에 소속되어 있던 광대들이 전국을 돌며 백희잡극을 하는 유랑광대가 되면서 다시 활기를 찾게 됨. ... 산대도감 계통의 탈춤중에서 강력한 남색 붉은색 금색등 화려한 의상과힘차게 뛰는 춤의 폭이 큰 것이 특징이며 다른 연희자와 달리 천대 받지 않은 사실과 세습에 의해 전승이 잘 이루인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