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왕〉 6년(1380)에 우리 태조〈李成桂〉를 따라 운봉(雲峯)에서 왜구를 격퇴하였고, 돌아와서 밀직제학(密直提學)에 제배되었다. ... 최후에는 밀직부사(密直副使) 진평중(陳平仲)이 거론되었는데, 진평중이 노비 수십 구를 임견미(林堅味)에게 뇌물로 주고 병을 핑계로 사임하였다. ... 이듬해에는 첨서밀직사사(簽書密直司事)가 되었다 고려사에는 정몽주는 왜구가 우리 양가(良家)의 자제들을 노예로 부리고 있는 것을 안타깝게 여겼고, 이에 속전(贖錢)을 주고서라도 돌아오게
이승휴의 셋째 아들인 이연종은 과거에 급제를 하여 사헌규정을 거쳐 밀직사 겸 감찰대부에 오르기도 했습니다.이승휴는 삼척의 두타산 천은사에서 제왕운기를 저술했기 때문에 삼척의 대표적인 ... 이승휴 가리이씨의 시조 두타산 자락에 있는 천은사에 용인당을 지은 뒤 제왕운기 저술 제왕운기--- 이승휴가 두타산의 천은사에서 두문불출하며 쓴 글 이 기간 동안에 이승휴는 강원도의 ... 제왕운기는 이승휴가 두타산의 천은사에서 두문불출하며 쓴 글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같은 해에 충선왕이 퇴위하게 되면서 광정원이 폐지되고 밀직사가 다시 설치되었다. 1310년 충선왕 2년에는 밀직사의 품격이 높아져 첨의부와 더불어 다시 양부라 불리게 되었다. ... 되기까지의 실력과 경력의 힘을 빌려 사회적으로 많은 영향력을 행사하였다. [4] 중추원의 시대별 변화 (고려 - 조선 - 대한제국 - 일제강점기) 일반적으로 중추개혁이 실시되면서 밀직사가
신라 건국지인 박혁거세의 후손이며, 좌복야 박언인, 밀직부사 박양언, 판도판서 박천익, 삼사좌윤 박을재, 도평의사사사 박언상 등 고려의 주요 관직 문벌귀족에 속한 집안이다. ... 또, 문관이 되어 승문원, 성균관, 교서관 등에 배치된다 하더라도 녹봉이 적어 먹고 살 길이 팍팍하게 느껴진다. 우리 집안이 이렇게까지 무너진 일은 오래된 일이 아니다.
날로 심해져서 뇌물이 폭주하고, 집에 있을 때는 술을 마시고 고기를 먹으며 제멋대로 여색을 즐기다가 왕을 알현하면 고상한 이야기를 나누고 채소와 과일을 먹고 차(茶)만 마시니, 밀직제학 ... 그 후 공민왕의 측근이었던 김용이 흥왕사에서 왕을 시해하려 한 흥왕사의 변란을 일으켰다. 공민왕 역시 측근들을 불신할 수밖에 없었다. ... .) 2) 송은명, 인물로 보는 고려사 , 시아출판사, 2003. p.278 3) 조일신이 반란을 도모하여 왕궁에 난입하여 신하들을 살해했다.
이 당시 모든 재상들은 화친 쪽에 찬성했고, 이에 밀직사사 조림이 명나라 조정으로 출발했지만 요동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 하지만 우왕과 최영은 이를 들어주지 않고, 대신 환관 김환을 과섭찰리사(過涉察理使)로 임명해 원수들에게 재물을 나눠주며 출진을 독려하게 했다. ... 종종 환관을 감찰사로 임명하는 일이 있다는것을 생각하면 이는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는 이성계, 조민수를 감시하기 위한 최영과 우왕의 판단이었을 수 있다.
때 왕이 김주정에게 장수로서의 능력이 있다하여 1280년(충렬왕6)에 만호로 임명하고 중서성에 청하여 소용대장군 좌우부도통이 되고 호두금패(虎頭金牌)와 인을 받았고 얼마 후 동지밀직사사로 ... 순문사 한취가 천거하여 도병마사사의 한 벼슬인 권지도병마록사에 임명되었고 1264년(원종 5년)에 장원급제하여 광주 해양현의 정8품 해양부록사에 임명되었다. ... 김주정의 부인은 증 판서 장득구의 딸 상질현 대부인 장씨와 찬성사 김련의 딸인 김씨와 판합문사 이신손의 딸 합천 이씨이다. 슬하에 2남 2녀를 두었는데.
정도전의 집안은 본래 향리의 집안으로, 경상도 봉화의 토착세력 이었으며 검교밀직제학을 지낸 정운경(鄭云敬)의 아들이다. ... 조선왕조실록 태조 6권, 3년(1894) 9월 9일자 : 왕이 판문하부사 권중화(權仲和)·판삼사사 정도전·청성백 심덕부·... ... 조선왕조의 개국공신으로서 태조대의 판삼사사를 역임하였다. 그는 고려에서 조선으로 교체되는 격동의 시기에 역사의 중심에서 새 왕조를 설계한 인물이었다.
이 지역은 원의 직접적인 관리 대상이였으며, 고려왕은 이곳을 제외한 영토를 다스렸다. ③첨의부, 4사, 밀직사 등 관제가 격하되었다. ... 이는 조선시대에 편찬한 고려사 기록을 그대로 차용했기 때문이다. 고려사는 조선 건국의 정당성을 강조하기 위해 객관적이기 보다는 주관적인 기록이 많다. ... 또한, 사적으로는 문란하고 동성애적인 성생활을 즐겼다. 그 대표적인 예가 1372년에 공신 및 고위 관직자의 자제들을 선발하여 자제위를 설치한 것이다.
그리고 1378년 우산기상시, 1380년에 왜구를 격퇴하고 밀직제학에 제배되었고 1385년에는 동지공거가 되어 관리를 선출하는데 힘썼다. ... 서론: 절개의 부재 유구한 역사를 지닌 한국사는 시대에 따른 다양한 변모 양상을 지니며 발전해 왔다. ... 『고려사』 권73, 우왕11년/1385 4월 13) 十年, 拜政堂文學. 本國與朝廷多?, 帝怒將加兵于我
항복하였다. 19)고려시대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의 종2품 관직. 20)고려시대 왕명 출납·궁궐·숙위(宿衛)·군국기무(軍國機務) 등의 정무를 담당한 중앙 관청으로, 추밀원(樞密院) 또는 밀직사 ... *참고문헌* 『신편 고려사11』, 고전연구실,2002 송은명, 『인물로 보는 고려사』,2003, 시아출판사 이한우, 『고려사로 고려를 읽다』,2012, 21세기북스 정성희, 『인물로 ... 강조(康兆) 1.들어가며 강조는 고려 초의 무신으로 목종(穆宗) 때 여러 관직을 거쳐 중추사 우상시(中樞使 右常侍)로 되었으며 외직으로 나가 서북면 도순문사(西北面 都巡問使)로 되었다
또 우왕 9년(1383) 17세에 문과에 급제하였고, 공양왕 2년에 밀직사대언(密直司代言)이 되었다. 1388년(창왕 즉위년)부터 이듬해까지 고려 왕실을 보호할 의도에서 감국(監國) ... 다음 해인 우왕 10년에 성절사(聖節使) 정몽주(鄭夢周)를 따라 명나라에 다녀오면서 다시 중앙정계에 복귀하며 전의부령(典儀副令)을 맡고, 이후 이성계의 추천으로 성균관대사성까지 오른다
하지만 원 간섭기에 들어서 원은 고려가 자신들의 황제국과 같은 급의 관제를 사용할 수 없다고 보았고, 그리하여 2성은 1부로, 6부는 4사로 그 격을 낮추었으며 중추원은 밀직사로 격하시켰다 ... 우리는 이런 조공-책봉 관계를 흔히 ‘사 대(事大)’라고 인식하고 이 사대는 늘 비난받아왔다. ... 고려사 , 세가 권7, 문종 10년, 9월 또한 고려사를 보면 제왕들을 ‘친왕’, 그리고 후작을 ‘후왕’(侯王)이라고도 부른 기록이 존재한다. 己未 燃燈, 王如奉恩寺.
우왕은 최영을 팔도 도통사(八道 都統使), 조민수를 좌군 도통사(左軍 都統使), 이성계를 우군 도통사(右軍 都統使)로 삼아 요동정벌군을 구성하였다. ... 이로써 이성계는 명실상부한 실권자가 되었고, 이성계가 정권을 잡게 되자 정도전은 밀직부사로 승진하게 되어 조준, 남은, 윤소종 등과 함께 이성계의 우익이 되어 전제(田制) 개혁에 착수 ... 백성들이 스스로 자립해서 먹고 살 수 있게 되면 왕은 백성들을 가르쳐 교화를 시켜야 된다.
공민왕 5년에 고려의 옛 땅을 회복하고자 하여 밀직부사 유인우(柳仁雨)를 동북면 병마사로, 대호군(大護軍) 공천보(貢天甫), 종부령(宗簿令), 김원봉(金元鳳)을 부사로 임명하여 강릉도 ... 이를 『고려사』를 통해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고려사』권38, 공민왕 1, 공민왕 임진 원년(1352) 계묘-을사. 6) 여동생이 원나라 순제의 눈에 들어 황후가 되었으니 원 순제의 매형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