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정진은 양물금단(洋物禁?)을 주장했으며, 이항로도 서양제품은 사지도 말고 쓰지도 말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 그 가운데서도 이항로와 기정진의 학파가 위정척사파를 형성했다. 이들은 이기론(理?論)에 있어서는 주리론(主理論)·이일원론(理一元論)의 입장에서 주기론(主?論)·기일원론(? ... 論)’, ‘양화배척론(洋貨排斥論)’ 등을 주장하며 통상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나고 제너럴셔먼호 사건이 발생하자 이항로, 기정진등은 양적(洋敵)과의 타협을 거부하는
우선 제1기는 1866년 위정척사운동의 이념을 정립한 이항로(李恒老)와 기정진(奇正鎭)이 활동한 병인양요기와 그 뒤 1871년 신미양요에 이르는 시기로, 주로 개별상소를 통하여 위정척사운동을 ... 조선 후기 서학(西學)의 충격에 대응하여 1866년 병인양요 이후부터 나타났으며, 그 대표적인 인물은 이항로(李恒老)·기정진(奇正鎭)·김평묵(金平)·최익현(崔益鉉)·유인석(柳麟錫) ... 위기의식에서 비롯되어 주로 성리학을 신봉하는 보수적인 유생들이 주도해 나갔는데, 그 논리 및 운동은 외세의 침투상황에 따라 단계적으로 전개되었다. 1866년 병인양요 당시에는 이항로, 기정진
趙性家와 崔琡民은 경상우도 蘆沙學派의 핵심 인물이라 할 수 있다. 그들은 南冥學派의 본거지인 경상우도에서 태어나 蘆沙 奇正鎭의 문인이 되었고, 기정 진의 학문을 전파하고 확장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던 사람들이다.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이들의 행적을 돌이켜보면 그들에..
기정진은 그 비문에서 농민군을 흉한 도적떼, 망령된 도깨비 등으로 표현한 반면, 농민군을 토벌한 지방 관리의 공적을 칭송했다. ... 또한 위정척사 운동은, 부패한 양반 체제와 외세의 침략에 반대하는 농민들의 저항을 탄압하는 입장에 서 있었다. 1869년 광양 농민 항쟁을 토벌한 기념비문을 지었던 기정진의 생각이,
月村 河達弘은 19세기 강우지역에서 활동했던 학자이다. 그는 실용 을 중시하는 학문경향을 가지고 南冥 曺植과 謙齋 河弘度를 존숭하며 慕寒齋에서 강학활동을 전개하였다. 이로써 인근의 학자들을 운집시키 고 그들에게 남명학파로서의 의식을 고취시켰다. 이때 月皐 趙性家ᆞ 溪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