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정진과 최익현의 위정척사사상 1. 기정진의 위정척사사상 (1) 인물소개(1798~1879) 본관은 행주(幸州). ... 위정척사운동의 깃발을 처음으로 올린 인물은 전라도 유생 기정진이었다. 기정진은 오직 독학으로 성리학을 연구했는데, 후대에 조선시대 성리학 6대가의 한 사람으로 평가받기도 한다. ... 기정진은 30대까지 학문연구에 전념하다가,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34세에 과거에 응시하여 장원 급제하였다.
(『화서집』권3) 2) 기정진(奇正鎭)의 척사위정사상 기정진은 일생 동안 벼슬을 멀리하고 학문에 전념하여 도학(道學)으로 일가를 이루었다. ... 기정진은 철학사상에 있어서 주리(主理) 혹은 존리(尊理)의 입장을 견지하였다. ... 기정진의 척사론은 존화양이라는 춘추의리론과 내수외양이라는 유가적 본말론을 벗어나지 않는다.
그리고 동양은 서양문물에 의해서가 아니라 동양의 전통적인 문화를 계승 발전시킴으로써 부강해질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3) 기정진기정진은 철학사상에 있어서 이항로와 마찬가지로 주리 ... 이러한 지지를 표방한 것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 이항로와 기정진의 상소를 들 수 있다. ... 기정진은 서양이 조선보다 물질적 측면에서 우세한 것은 다만 기의 현상일 뿐이며, 조선은 천명과 인륜에 따르는 존리의 국가라고 주장한다.
기정진은 이러한 상황을 ‘해구동래지조(海寇東來之兆)’라고 하여 침략의 전조(前兆)로 판단하였다. ... 기정진은 1866년 「병인소(丙寅疏)」에서 당시 수시로 도래하는 서양 선박에 대한 기본적인 대응 논리를 개진하였다. ... 기정진은 이와 같이 서양인의 궁극적 의도를 간파하고, 그들에 대응하기 위해서는 우선 조정의 정책이 확고하게 세워져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정재규는 19세기 중반 이후 강우지역에서 일었던 학맥의 융합 분위기에도 아랑 곳 않고, 기정진을 집지한 이후부터 일관되게 노사학에 매진하였다. ... 그는 22세 때 전라도 장성의 노사 기정진(1798-1879)에게 수학하였고, 쇠잔 했다고는 하나 여전히 남명학의 영향력이 건재하던 강우지역에 노사학을 확립 한 핵심 인물이었다.
溪南 崔琡民(1837-1904)은 기정진의 제자이자, 다양하게 전개되어 온 기호 학맥의 끝자락을 장식한 인물이다. ... 특히 그는 그의 스승 기정진과 함께 율곡학 파에 귀속되긴 하지만, 그의 성리학적 구도는 율곡학이나, 이이의 시각을 수정 없이 그대로 계승한 계열과 많은 차별성을 보여준다.
이 논문은 이항로ㆍ기정진ㆍ이진상 3인이 보여준 ‘심즉리’를 사단칠정논쟁과의 관련성 속에서 이해해 본 것이다. ... 반면 이항로와 기정진의 ‘심즉리’는 기대승과 이이의 시각을계승할 경우 결과적으로 도덕주체가 부정되어버리는, 곧 ‘기발리승일도설’과 ‘심시기’의 이론체계에 내재해 있는 문제를 해결하기
기정진의 직전제자이면서도 화서학파, 한주 학파, 안동의 퇴계문인 등과도 학문적 교유를 확대하였다. ... 노론의 色目을 가지고 있었던 조성 가나 정재규와는 달리, 그는 남인의 색목을 가지고 있으면서 기정진의 문하에 들어갔다. ... 따라서 理의 절대적 우 위성을 확보하고자 理一元化 경향을 보이는 기정진의 학문을 현실적 측면으로 까지 확대·강화한 것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