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륭·가경연간의 사학과 새로운 사체와 사서
- 최초 등록일
- 2009.03.16
- 최종 저작일
- 20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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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Ⅰ. 서론
Ⅱ. 본론
1. 주요 성과
1) 옛 서적의 교정과 주석, 옛 사실의 고증
2) 위서의 변별과 일서의 집록
3) 개작·보작, 옛 역사의 분담 편찬
2. 건·가 시기 사학 고증의 3부 명저
Ⅲ. 결론
본문내용
Ⅰ. 서론
강희·옹정·건륭(이하 강·옹·건) 시기는 청조가 한창 융성한 시기였다. 청 조정은 약간의 조치를 통해서 전국의 농업·수공업과 상업의 회복과 발전을 하였으며, 봉건경제는 고봉에 도달하고 자본주의 맹아도 전대에 비해 성장했다. 또한 전국의 인구도 해가 갈수록 함께 증대하고, 강·옹·건 3조는 변강을 정돈하여 할거세력을 제거하고, 유효한 국토 행정관리를 실행하여 국가의 통일을 공고히 하고 증강시켰다. 이와 같은 사회경제적 발전과 정치적 통일, 안정은 학술문화의 번영을 위한 기초를 제공했다.
청조도 역대 왕조와 마찬가지로 역사편찬 기구를 설립하고, 관에서 완비된 기거주(起居注)와 실록을 편찬했으며, 국사관은 실록 등 재료에 근거하여 국사를 편찬했다. 청 조정의 규정에 의하면 “국사의 체재는 첫째가 본기이고, 둘째가 전이며, 셋째가 지, 마지막으로 표가 있다.” 이는 사관에서 관이 편찬한, 완비되고 체계적인 당대사 자료이지만, 청대는 전대와는 달리 이전의 관찬 실록을 선비가 전하고 필사하는 것만 윤허하고, 청대 실록과 국사는 궁중 및 사관에 깊이 소장하여, 민간에 대하여 당대사 자료를 봉쇄하고 사람들에게 현실정치에 참견하지 못하게 하였다.
강·옹·건 시기는 또한 봉건문화 전제주의가 창궐한 시대였다. 법률은 삼엄하고 문자옥의 사안은 잇달아 일어나 개인이 당세의 일을 저술하는 것은 걸핏하면 재난을 입었다. 동시에 명의 멸망에서 이때까지 이미 100년이 지나 명의 유로 대학자는 거의 죽어 사라지고 뒤에 등장한 역사가는 모두 새 왕조에서 생장하고 심지어는 청의 봉록을 받아 청조에 대한 원한도 자연히 경감되거나 소실되었다. 게다가 건륭제가 “문을 숭상하고 옛것을 고찰한다.”고 표방하였으며, 이에 따라 명·청 교체기 사학 중의 강렬한 민족사상, 경세치용의 정신, 봉건전제에 반대하는 민주사상은 바로 계승되기가 어려웠다.
낙후된 봉건전제 제도는 장기간 개혁될 수 없었으나, 명말 청초의 학자들은 송·명 이학이 책을 묶어두고 보지 않으며 마음과 성(性)을 공론한 것을 비판하고 “글은 널리 학습하고”, “실제의 일에서 진실을 구한다.”는 학풍과 다름과 같음을 고찰 변별하며 널리 증명하고 인용하는 고거(考據)방법을 제창했는데, 그들의 이러한 측면의 학문연구 태도는 건륭 시대에도 억압과 부정을 당하지는 않았다. 이는 청 조정이 학술문화 영역에서 의도적으로 송학을 제압하고 한학을 부식했기 때문이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