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감절요 주기 위열왕편
- 최초 등록일
- 2008.12.17
- 최종 저작일
- 20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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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통감절요 중 주기 위열왕편 부분입니다~~
목차
◎ 위열왕 (威烈王, 이름은 오(午), 재위 기간은 24년)
본문내용
≪통감≫이 위열왕 23년을 시작으로 한 것은 위로는 공자(孔子)의 ≪춘추(春秋)≫를 계승하는 뜻을 밝힌 것이다. ≪춘추≫는 노(魯)나라 애공(哀公) 14년에서 끝맺었는데, 위열왕 23년과는 80여년의 거리가 있다. 그러나 위열왕 23년의 기록에 바로 이어 애공 23년에 발생한 조양자(趙襄子)가 지백(智伯)을 죽인 사건을 서술함으로써 ≪통감≫이 ≪춘추≫를 계승하고 있음을 분명히 하였다. 다만 바로 이어 서술하지 아니하고 거리를 둔 것은 성인의 저술을 감히 바로 잇지 못한 것이다.
사가(史家)들은 위열왕 23년을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출발로 보고 있다. 이 해에 발생한 한ㆍ위ㆍ조 삼가의 분진(分晉)과 뒤 이은 전씨(田氏)의 제(齊)나라 찬탈이 춘추시대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와해시킨 중요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진나라는 춘추시대의 가장 강력한 제후국으로 본래는 11경(卿)이 있었는데, 뒤에 범씨(范氏)ㆍ중행씨(中行氏)ㆍ지씨(智氏)ㆍ한씨(韓氏)ㆍ위씨(魏氏)ㆍ조씨(趙氏) 등 육가(六家)가 육경(六卿)이 되었다. 소공(昭公) 이후 진나라의 국정은 이들 육경에 의해 천단되었고, 이들은 100여년 이상을 세습하면서 권리쟁탈을 위해 각축을 벌였다. 그 결과 진의 공실(公室)은 나날이 쇠약해져 갔다. B.C.497년에는 한씨ㆍ위씨ㆍ조씨ㆍ지씨의 4가(家)가 진정공(晉定公)을 받들어 범씨와 중행씨를 정벌하였다. 그 뒤 진은 지백(智伯)이 일시 독점하였는데 토지 분배를 둘러싸고 내분이 발생하여 마침내 지씨가 몰락하고, 그 토지를 한ㆍ위ㆍ조 3가(家)가 나누어 갖게 되었다. 이어 진유공(晉幽公) 때에 이르러 삼가는 이미 쇠약해진 진 공실의 토지마저 빼앗아 분배함으로써 진은 멸망하고, 삼진이 성립되기에 이르렀다.
그런데 삼진은 각국이 모두 3면 4면으로 적대국과 국경이 인접해 있어 크고 작은 충돌이 끊이지 않았고, 기질 또한 다분히 호전적이었다. 이러한 삼진의 출현은 전국시대의 국가 간 세력 변동을 둘러싼 무수한 전쟁을 발생시킨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당시 천하의 판도를 보면 삼진(三晋)을 중심으로 북쪽에는 연(燕), 남쪽에는 초(楚), 동쪽에는 제(齊), 서쪽에는 진(秦)이 세력을 떨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이들을 일러 이른바 전국칠웅(戰國七雄)이라고 한다.
주(周)나라는 무왕(武王)에서부터 평왕(平王)에 이르기까지가 13세(世)이고, 평왕에서부터 위열왕까지가 또 18세이다. 위열왕 때에 이르러 주나라 왕실이 쇠미하여져 실권이 없는 천자(天子)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후 5세를 더하여 난왕(王)에 이르러 마침내 진(秦)이 주나라를 멸하고 말았다.
참고 자료
[司馬光 저]江贄 [편], 金都鍊ㆍ鄭珉 [共]譯註, 『(懸吐完譯) 通鑑節要』, 傳統文化硏究會, 19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