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랑군의 역할과 역사인식
- 최초 등록일
- 2008.05.31
- 최종 저작일
- 20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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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기원전 108년 고조선 패망 이후 세워진 한사군 중 유일하게 실질적인 역할을 해냈던 낙랑군이
가졌던 한반도 열국들과 중국 한나라와의 가교 역할 등을 통해 기존의 정치적인 관점에서
가져 왔던 부정적인 인식에 그치지 않고 경제적, 문화적인 면에서 한국 고대사에 투영하는
의의를 살펴보았다.
목차
Ⅰ. 머리말
Ⅱ. 樂浪郡의 役割
Ⅲ. 周邊國家의 成長
Ⅳ. 樂浪郡의 歷史認識에 대한 論爭
Ⅴ. 맺음말
본문내용
기존의 韓國史에서 인식하고 있는 樂浪郡은 정치적인 성격이 강하여 대동강 하류의 平壤 일대를 지배하고 夫餘·高句麗 및 三韓 등을 견제하는 역할로 그려지고 있는 경우가 일반적이다. 물론 衛滿朝鮮을 멸망시키고 그 중심지에 樂浪郡이 설치되었기 때문에 주변지역에 대한 통제는 반드시 수반되어야 할 요소이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됨에 따라 樂浪郡이 그대로 漢四郡 설치 당시의 역할을 그대로 유지했는가에 대해서는 아래에 다루어 볼 내용에 의하면 그렇지 않음에 더 신빙성이 있다. 樂浪郡은 설치 직후 郡內에 縣을 설치하여 행정구역을 개편하였는데 郡縣勢力의 형성과 더불어 주변국가에 대한 움직임도 살펴보아야 한다. 夫餘와 高句麗의 경우 漢四郡 중 가장 마지막(기원전 107년으로 앞의 3군보다 1년이 늦음)에 설치된 현도군이 관리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기원전 75년에 高句麗 세력에 의해 축출되어 요동 지방으로 이동하여 설치되었는데, 원래 목적이었던 부여와 高句麗의 관리에 비해 한참 후퇴된 의미인 부여와 高句麗의 염탐 및 중국으로의 소식통 등으로 쇠퇴되었고 덩달아 요동군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졌다. 기원전 75년에 현도군이 축출되었다는 것은 주몽이 등장한 기원전 37년 이전에도 이미 高句麗의 밑바탕이 된 세력이 존재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韓에 대한 郡縣의 정책은 무력에 의한 통치보다는 朝貢貿易과 冊封 등을 통한 견제를 중심으로 관계가 이루어졌다. 나머지 2군인 진번군과 임둔군은 설치되었다는 기록은 있지만 기록상에서 언급된 경우는 거의 없으며 결국 진번군은 樂浪郡의 남부도위, 임둔군은 樂浪郡의 동부도위로 각각 합병되어 사실상 폐지되었는데, 강력한 대외정복을 추구했던 漢武帝 이후 沃沮와 東濊 등 인근 세력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혔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倭는 韓과 비슷하게 원거리의 왕래에도 불구하고 활발한 朝貢이 이루어져 魏代에는 이전에 公孫氏가 설치한 帶方郡을 통해 親魏倭王이라는 칭호가 冊封되었던 사실은 郡縣이 東夷圈에서 중국을 대신하여 기미외교책을 펼친 대리자 혹은 중간거점지의 성격을 보이고 있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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