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삼국통일을 어떻게 볼 것인가
- 최초 등록일
- 2008.01.04
- 최종 저작일
- 200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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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신라 삼국통일에 관한 여러 학자들의 의견과 저의 의견을 비교하였습니다
목차
1. 그 당시 신라의 지배세력들이 ‘통일’의식이 존재했는가?
2. 통일을 할만큼 같은 민족의식이 있었는가?
3. 영토상으로 볼때 불완전한 통일이 아닌가?
4. 외세를 이용한 비자주적인 통일이 아닌가?
5. 결국 당군을 고구려, 백제 유민과 함께 몰아낸 것이 통일의 의의가 아닌가?
6. ‘통일신라’, ‘통일’이라는 용어사용이 적합한가?
본문내용
1. 그 당시 신라의 지배세력들이 ‘통일’의식이 존재했는가?
신형식 : 고대국가는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국토의 확장이 국가의 목표였고 국토의 확장이 곧 통일의지다. 이런 통일의지가 4~6세기 삼국에게 있었으나 백제와 고구려는 계승․발전 못했고, 신라에 의해서만 통일의지가 발전되었다. 6세기 후엽이후로 백제와 고구려 양국인들은 스스로 통일의지를 포기하였다.
백제와 고구려 유민에 대한 정치적 차별대우를 불식시키지 못한 한계는 분명하다. 이러헌 한계는 고려의 통일에서 크게 보완되었다.
김영하 : 신라는 본래 백제정복을 위한 당의 군사적 지원을 얻는 대신에 당의 고구려 정벌에 대한 후원을 약속하였다. 신라가 백제통합만을 목표로 삼은 것은 신문왕대에 지방통치조직을 일제히 정비하는 과정에서 예성강 이북지역을 방치한데서 확인되고 있다. 대동강 이남지역의 영유권은 발해의 당에 대한 공격을 견제한 대가로서 당으로부터 인정받은 것이다.
나 : 국토의 확장을 통일의지라고 규정하는 것은 무리라고 본다. 고구려와 백제의 6세기 이후로 스스로 통일의지를 포기하였다는 것도 몇 개의 사실만으로 일반화한 경향이 있다. 통일의지 포기가 아니라 국력의 약화라고 하는 것이 올바른 표현이겠다.
2. 통일을 할만큼 같은 민족의식이 있었는가?
신형식 교수 : ① 삼국은 부여의 일파로서 동일족이다. (중국 측 사료인 『南史』, 『隋書』, 『舊唐書』인용) ②언어적 동질성이 있었다 - 김유신과 연개소문의 대화에서 통역관이 없었다. 「조선전사」의 삼국의 언어비교 인용. ③ 통일 후 백제와 고구려인을 중앙군인 9서당에 배속시킨 것은 동일 민족의식을 전제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다.
결국 삼국통일은 민족동질성을 바탕으로 이룩된 운동이며, ‘三韓爲一家’가 된 역사적 사건이다.
김영하 : 백제멸망 후 신차원이라는 인물은 석상의 명문에 백제 관등 계속 사용, 고구려나 백제의 부흥운동 때 지방세력이 호응하였다.
나 : 동일민족이라는 것과 민족의식이 있었다는 것은 구분해야 한다. 신라의 통일이후에 민족개념이 미약하나마 생기지 않았나한다
참고 자료
김영하, 「신라 삼국통일론은 타당한가」, 『역사비평』22, 역사문제연구소, 1993.
신형식, 「신라 삼국통일의 역사적 의미」, 『선사와 고대』2, 한국고대학회, 199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