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종의 제국』을 읽고
- 최초 등록일
- 2007.12.21
- 최종 저작일
- 200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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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2003년도에 푸른역사에서 출판된 김창현 저자의 광종의 제국을 읽고 쓴 독후감입니다.
총 7장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6장까지는 내용을 축약해 놓았구요 1장에 감상을 남겼습니다.
교양 리포트로 썼던 것이구요.
목차
없음
본문내용
통일신라 말기에 도래한 후삼국의 난세는 변방 송악 출신인 태조 왕건에 의해 평정되었다. 왕건이 통일 대업을 달성할 수 있었던 가장 근본적인 요인은, 지방세력인 호족들과 군대를 지휘하는 장군들의 적극적인 지원을 이끌어낸 데 있었다. 그런데 막상 대업을 이룬 후에는 그들이 왕의 권위와 중앙권력에 부담으로 작용하기 시작했다.
왕건은 우선 호족들이 장악한 지방을 통제하기 위해 몇 가지 정책을 시행하였다. 태조 23(940)에 지방행정 단위인 주․부․군․현의 호칭을 개정하여 자신에게 충성을 바친 정도에 따라 지방의 격을 정하고, 각 지역을 지배하는 성씨를 정해 본관을 부여한 것이 대표적이다. 이로써 왕의 권위는 상당히 강화되었다. 공신들의 세력이 크긴 했지만 태조 왕건이 통치하고 있는 동안은 평온을 유지하였다. 또한 왕건을 임금으로 추대하였거나 통일전쟁을 함께 치른 원료 영웅들이 하나 둘 세상을 떠나면서 왕건의 정치적 부담을 어느 정도 덜어주었다.
왕건은 예순일곱 살 되던 해인 태조 26(943) 자신의 운명이 다했음을 느끼고, 그해 4월 대광 박술희를 불러 훈계하는 10조목인 <훈요>를 남겼으며, 5월에는 측근들에게 기무의 처리를 위임하고 선덕전에서 붕어하였다. 왕건이 붕어하자 태자 왕무가 왕위에 올라 여러 신하들을 거느리고 애도하였다.
왕건이 남긴 유산 가운데 가장 큰 문제는 배우자와 자식이 너무 많다는 것이었다. 왕건은 장군일 때와 임금이 된 후 수많은 여인들과 혼인했는데, 대부분 정략적인 이유로 맺어졌다. 《고려사》에 따르면 왕건의 배우자는 무려 29명이나 되고, 자식도 왕자가 25명, 공주가 9명이었다. 여기에 누락 된 것으로 여겨지는 대량원부인을 추가하면 배우자는 30명이 된다. 이처럼 많은 배우자들과 그들이 낳은 왕자들로 인해 왕위계승 분쟁이 더욱 치열해졌다.
왕건은 즉위한 해에 왕무를 정윤에 책봉하려다가 포기하고, 태조 4년에 정윤에 책봉하였다. 왕무의 외가 세력이 미약한 탓에 정윤 책봉을 미루고, 박술희와 같은 지원 세력을 확보한 뒤에야 왕무를 정윤에 책봉한 것이다. 이는 왕건 즉위 초기에 왕권이 불안했음을 시사할 뿐 아니라, 외가가 약한 왕무의 앞날을 예측할 수 있게 한다.
참고 자료
김창현, 광종의 제국, 푸른역사,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