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사] 1876년~1904년의 `친일`의 논리와 실태
- 최초 등록일
- 2007.11.08
- 최종 저작일
- 2007.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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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1876년~1904년기 친일파가 형성되는 과정과 그들의 논리와
일제강점이후 어떻게 변해가는지 파악하였다.
목차
1. 서론
2. 1905~1919 년의 친일파와 그 논리
3. 문화 통치시의 친일파
4. 1930년대의 친일 논리
5. 민족 말살기의 친일과 변절
본문내용
1. 서론
일본은 자신들이 도발한 운양호 사건을 트집 잡아, 1876년 2월 조선에 군함과 함께 전권대사를 보내 협상을 강요했다. 그 결과 양국간 불평등 조약인 강화도 조약이 맺어졌다. 체결이후 조선은 일본에 수신사를 파견하는데 바로 이 수신사파견이 친일세력이 등장하게되는 역사적 계기가 되었다.
수신사 파견시 혹은 신사 유람단으로 일본을 다녀온 인사들로 친일파가 형성되었는데, 이시기의 친일은 우리를 속국으로 삼던 청나라에 대응하기 위해 일본으로부터 근대화의 한 모델을 가져오는 반외세의 수단이었다.
1884년의 갑신정변 실패 이후 김옥균 등을 후원하던 후쿠자와는 1885년 탈아론을 발표하였고, 같은 시기 다루이는 홍화론을 주장한다. 홍화론은 서양 vs 동양, 백인 vs 유색인종이라는 대립되는 구조를 바탕으로 한 아시아 연대론적인 입장이었다. 이 논리가 독립협회이후의 단계에서 우리에게도 전파되는데 삼국 공영론이 그것이다.
초기의 삼국 공영론은 일본맹주론을 기반으로 하면서도 일본의 침략적 자세에 대해서는 일면 경계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일본의 침략야욕에 대한 이러한 안이한 의식은 러일 전쟁무렵, 본격적 친일론으로 바뀌어갔다.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이 한국의 독립을 위한 것이라는 논리는 일본에 의한 보호국화 역시 당연히 여기고 후에 계몽운동기의 적극적 친일론의 근거가 되었다.
2. 1905~1919 년의 친일파와 그 논리
1905년 실질적인 식민지가 되었던 보호조약을 체결할 때 친일파는 이를 주권 포기로 여기지 않았다. 사실상 이 조약을 주도하였던 이완용은 단지 외교하나만 외국에 기대는 것이며 우리의 부강을 이루면 되돌려 받을 것이라 강조하였다.
1907년 5월 총리 대신이 된 이완용은 일본과 더욱 적극적으로 제휴 할 것을 주장하였다. 한국의 내정을 혁신하고 시국의 이해를 정돈하는 것은 선진의 도움 없이는 도저히 불가능하다고 하였고 1904년에 결성된 일진회도 이 논리에서 출발하였다.
참고 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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