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30년 전쟁
- 최초 등록일
- 2007.07.16
- 최종 저작일
- 20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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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30년 전쟁,
왜 발발했으며 무엇이 달라졌나.
목차
1.30년전쟁의 배경과 원인
2.30년 전쟁의 경과
3.30년 전쟁의 결과
본문내용
1. 30년전쟁의 배경
(1) 종교전쟁의 기원
종교개혁이후 영주, 기사, 도시민들은 그들의 이해관계로 개신교로 개종했지만, 마인츠, 쾰른, 트리어의 선제후 같은 막강한 주교나 제국 수도원장들은 그들의 특권유지를 위해 거세게 시대의 흐름을 반대했다. 황제 칼 5세 역시 카톨릭을 지지하고 개혁을 거부했는데 당시 제국 정부는 주로 동생 페르디난트의 수중에 있었다. 그래서 독일의 영주들은 황제가 자리를 비운 사이에 자신들의 권리를 신장시켰다. 그러나 황제는 신성로마제국의 황제이자 스페인의 국왕으로서 이탈리아에서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해 숙적 프랑스와 다투었을 뿐만 아니라 합스부르크 가문의 세습영토인 오스트리아를 위협해오는 터키 군과도 싸워야 했기 때문에 그 들을 막을 수가 없었다.
그 후 1526년 슈파이어에서 소집된 제국의회에서 보름스 칙령 종교개혁을 주장한 루터의 법익(法益)을 박탈하고 재산을 몰수하며 그의 저서를 전파하는 자들도 처벌하는 내용이었으며 그와 그를 따르는 무리들을 추방한다는 내용이었다. 다만 제후들이 이미 모두 귀향한 뒤여서 칙령의 시행은 결정되지 못했다.
을 무효선언하고 영주들의 양심의 자유를 허락했다. 그러나 카를5세는 1529년 이탈리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그 지위가 더 확고해져 보름스 칙령을 재발표했다. 그러자 루터를 지지하는 제후와 도시들은 이 조처에 항의(Protest) 여기에서부터 개신교도를 가리키는 ‘프로테스탄트’라는 말이 유래하게 되었다
하였다. 10년 후 아우크스부르크 의회에서 카톨릭 측은 보름스 칙령을 다시 강조하여 이것을 지키지 않은 것은 평화조약을 위반하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위협을 느낀 개신교 진영은 1531년‘슈말칼덴 동맹’이란 군사적 동맹체를 결성하여 황제진영에 대항하고자 했다. 이에 맞서 교황과 동맹을 체결한 황제는 슈말칼덴 동맹군을 공격하여 큰 승리를 거두기도 했지만 개신교 진영이 프랑스의 지원을 받아 황제에게 맞서자 그 어느 쪽도 제국에서의 결정적인 주도권을 장악할 수 없게 되었다. 결국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에서 열린 종교화의를 통해 타협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로써 지역을 통치하는 자가 종교를 결정 한다 cuius regio, eius religio.
는 신앙 속지주의 원칙에 따라 제국의 제후들은 가톨릭이나 루터교 중에서 하나를 선택할 수 있는 자유를 획득하게 된 것이다. 하지만 이는 개인의 신앙적 자유를 인정한 것도 아니었고 제국의 종교적 분쟁이 이로써 완전히 해결된 것도 아니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