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최초의 여기자 `최은희`의 삶과 그 시대
- 최초 등록일
- 2007.06.21
- 최종 저작일
- 20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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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최초의 여기자로, 최은희 여기자상을 만든 최은희의 삶과 그 시대에 대한 글 입니다.
두개의 챕터로 구성되어 있으며, 앞의 챕터는 최은희의 인생과 업적에 관해서
다음 챕터는 최은희라는 여성이 존재할 수 있었던 시대적 상황에 대해서
생각을 적은 글입니다.
단순히 요약만 해놓은 것이 아니라 생각을 적은 것이니 레포트에 도움될 것입니다.
목차
1. 최은희의 생애
2. 그 시대와 최은희
본문내용
1. 최은희의 생애
1) 출생과 학창시절
최은희(崔恩喜)는 1904년 황해도 연백군에서 탐진 최 씨 장경공의 후손인 부친 최병규와 어머니 서덕경의 5남 5녀 중에서 막내딸로 출생하였다. 그의 부친 최병규는 대한 제국 말 서울에서 낙향하여 농토를 빈민에게 무상분배하고 노비 해방, 신분 타파에 앞장섰으며 학교도 3개나 새운 개화파 우국지사로 볼 수 있다. 유복한 개화 집안에서 10남매의 막내딸로 태어난 그녀는 어려서부터 부친의 혁신적인 성향에 대한 영향을 받았으며 학교에서는 배일독립사상을 키웠다.
그녀는 해주 의정여학교에서 배일사상을 강화하는 교육을 받았다. 최은희의 반일감정의 배경은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나왔다고 볼 수 있는데, 그녀의 항일정신은 해주 의정여학교 고등과에 진학하면서 조직적이며 분명해졌다. 당시 학감 최두현과 교무주임 노선형의 지도하에서 조선인을 노예화시키는 일본인에 대한 항일정신을 고취시키는 교육을 몰래 또, 편법적으로 받았던 것이다.
서울로 상경해서 경상여자고등보통학교(현 경기여고)에 진학한 후에는 영신학교 부교장인 박희도(朴熙道)의 지도 아래 매주 일요일에 모여 비밀 서클에서 항일 사상을 키웠다. 3학년 때 3.1 운동이 일어나자 박희도의 지도로 3백여 명의 전교생의 선두에서 만세시위에 참가, 구류의 처분을 받기도 했다. 후에 풀려난 그녀는 고향으로 돌아가서 다시 만세시위를 주동하였고 징역형을 받고 후에 복권되었다. 그 후 일본유학 시절에도 그녀는 내내 요시찰인, 불령선인으로 조사받기 일쑤였으며, 그때 같은 동기유학생으로 황신덕, 박순천, 이현경 등과 친하게 지냈다.
요컨대, 최은희의 학창시절은 민족의식과 반일, 배일사상의 강화의 시기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조국이 일제에 강점당하던 시기였던 만큼 한편으로는 학업에 열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조국의 국권회복을 위하여 활동하였던 고난의 연속이었다고도 할 수 있다.
참고 자료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