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후한도교의 성립과 황건적
- 최초 등록일
- 2007.05.19
- 최종 저작일
- 20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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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머리말
2 도교교단의 성립
3 황건난 발생배경
4 황건난 발발
5 태평도와 오두미교
6 황건의 난과 종교적 반란의 의의
7 맺음말
본문내용
머리말
후한 중기 이후 중앙에서는 외척과 환관의 치열한 싸움으로 정치가 문란하고 지방에서는 호족에 의한 대토지사유화가 촉진 되면서 농촌사회는 극도로 피폐하여졌다. 더구난 천재와 기근이 계속되어 농민은 만성적인 기아상태에 빠져 들면서 순제(順帝) 때부터 매년 각지에서 농민반란이 발발하였다.
이렇게 농촌사회가 어지러워지고 있을 즈음 서역지방에서 들어온 불교가 서서히 그 세력을 뻗어 나갔다. 또 불교와 함께 들어온 서역의 점성술에 바탕을 둔 미신이 유행하여 중국 전래의 민간신앙과 결합하고, 다시 불교교단의 조직을 모방하여 불로장생(不老長生)의 종교적 결사를 만들게 되었다. 이들 교단은 교의(敎義)면에서는 보잘 것이 없었다. 그러나 고난에 시달리는 하층 농민을 끌어들이는 힘은 강하였다. 특히 단원간의 상보상조정신은 불행한 처지에 있던 농민의 마음을 사로잡는데 충분하였다. 이러한 사회적 배경에서 농민들은 서로 간에 단결을 이루고 하나에 조직체를 만들에 정부에 대항하게 되었다. 대표적으로 오두미도와 황적적이 되겠다. 여기서 알아 볼 것은 이 두 종교 단체의 모태가 되는 도교의 성립을 알아보고 황건적의 난 이주로 알아보도록 하겠다.
1. 도교교단의 성립
정의감에 불타는 학자들의 지지가 확실하지 않았기 때문에 환제는 대신 새로운 종교운동의 신도들, 즉 도교 신도로부터의 지지를 타진하였다. 도교 신앙은 2세기 동안 중요한 변화를 경험 하였다. 이전 세기에 『도덕경』의 저자라고 일컬어지는 노자를 불사(不死)를 얻으려는 희망을 가진 많은 추종자들의 관심을 끌었다. 이는 도교 신앙을 통렬히 비난했던 회의론자 왕충의 글에 잘 나타나 있다. 2세기 언젠가부터 도교 신도들 사이에 노자가 자신들을 구원해줄 수 있는 예언자로서 신도들로서 신도들에게 모습을 보인 신이라는 믿음이 시작 되었다.
참고 자료
다니가와 미치오, 모리마사오, 송정수 역, 「중국민중반란사」, 혜안, 1996.
발레리 한센, 신성곤 역 「열린제국 : 중국 고대-1600」, 까치, 2005
신채식, 「동양사개론」, 삼영사, 2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