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장수왕대의 평양천도
- 최초 등록일
- 2006.12.09
- 최종 저작일
- 2005.09
- 17페이지/ 한컴오피스
- 가격 1,500원
소개글
고구려 장수왕대 이루어진 평양천도에 관한 레포트
목차
Ⅰ. 머 리 말
Ⅱ. 평양천도 이전의 고구려 정세
Ⅲ. 평양천도의 원인
1. 정치외교적 측면
2. 군사적 측면
Ⅳ.평양천도 이후의 변화
1. 북조국가들과의 관계
2. 남조국가들과의 관계
3. 백제신라와의 관계
Ⅴ. 맺 는 말
본문내용
Ⅰ. 머리말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일제시대인 1925년 북경에서 망명생활을 하면서 《동아일보》에 〈조선 역사상 1천 년래 제일대사건〉이란 유명한 논문을 연재했다. 이 논문에서 신채호 선생은 우리 민족이 쇠퇴하게 된 이유를 사대주의의 노예가 된 때문이라며, 그 계기를 ‘고려 인종 13년(1135) 묘청이 김부식에게 패함이 그 원인’이라고 단정지었다.
하지만 신채호 선생이 ‘조선 역사상 1천 년래 제일대사건’이라고 하며 고려시대 이후를 기준으로 삼지 않고 ‘2천 년래 제일대사건’이라고 선정기준을 하였다면, 과연 똑같이 그 사건을 제일대사건이라고 말했을까?
만약 2천 년래 제일대사건을 선정한다면 무엇이 될까? 『삼국사기』는 장수왕이 “재위 15년(427)에 평양으로 천도했다.”며 간략하게만 기술했으나 장수왕의 평양천도는 조선 역사상 2천 년래 제일대사건으로 선정해도 좋을 정도로 커다란 사건이다. 그러나 지금껏 상대적으로 소홀히 다루어져 왔다.
이런 장수왕의 평양천도는 지금껏 남하정책의 산물로 많이 설명되어 왔다. 고구려가 만주지역을 아우르는 전통적인 북방정책을 포기하고 한반도 남부를 공략하려는 남방정책을 추진하기 위한 것이라는 설명이다. 그 배경으로 서기 386년, 건국한 선비족의 북위가 화북 이북을 지배하는 신흥강국이 되자 북위와 충돌을 피하면서 국가를 안정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평양으로 천도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당시 중국은 남북조시대라 불리는 유명한 분열시대로서 중국 대륙 내부의 분란을 수습하는 것이 일차적인 과제였다. 중국 화북지역을 무대로 한 북조는 여러 이민족들이 각축을 벌이다가 439년(장수왕 27년) 북위에 의해 통일되었으며, 화남지역을 무대로 하는 남조는 동진(317~420), 송(420~479), 남제(479~502)가 차례로 흥망을 거듭하고 있었다. 장수왕은 즉위하던 해(413) 남조의 동진에 사신을 파견해 70년 만에 남중국 국가와 교섭을 재개했다. 이후 동진을 이은 송과 남제와도 계속해서 국교를 수립해 중국 남조국가들과 유대를 강화했다.
참고 자료
신형식, 『고구려사』, 이화여자대학교출판사, 2003.
서병국, 『고구려제국사』, 혜안, 1997.
김용만, 『고구려의 발견』, 바다출판사, 1999.
국사편찬위원회, 「삼국의 정치와 사회 - 고구려」, 『한국사』5, 국사편찬위원회, 1996.
서영대, 「고구려 평양천도의 동기」, 『한국문화』2, 1981, pp.81~139.
박성봉, 「광개토호태왕기 고구려 남진의 성격」, 『한국사연구』27, 1979, pp.1~27.
공석구, 『고구려 영역확장사연구』, 서경문화사, 1998.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