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학]정한론의 형성배경 및 전개과정 분석
- 최초 등록일
- 2006.09.26
- 최종 저작일
- 2006.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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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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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1. 정한론의 개념 및 개관
2. 조선 멸시관의 형성
3. 정한론의 전개
4. 정한론의 발생
5. 정한논쟁
6. 정권교체기의 정한론
7. 맺음말
8. 참고자료
본문내용
1868년(고종 5) 일본정부는 그들의 왕정복고(王政復古)를 조선정부에 통고하고 양국의 국교회복을 청하는 사신을 보내 왔으나, 척왜정책(斥倭政策)으로 기운 대원군 집정의 조선정부는 서계(書契)의 격식이 종전과 같지 않고 도서(圖書)도 조선정부가 인각(印刻)한 것이 아니라는 이유를 들어 사신의 접견조차 거부하였다. 이로부터 양국은 외교문서의 수리를 놓고 1년을 논박으로 보내다가 일본은 대조선(對朝鮮) 외교를 전담하여 온 쓰시마도주[對馬島主] 소오씨[宗氏]로부터 그 직임을 회수하고 1869년과 1870년 외무성 관리를 파견하였으나, 조선측의 완강한 거부에 부닥쳐 타결을 보지 못하였다. 1872년에는 외무대승(外務大丞)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가 군함을 이끌고 부산에 내도하였으나, 조선측은 `왜사(倭使)가 군함을 타고 오다니 상대해 줄 수 없다`고 냉대하여 수개월 동안 체류하다가 돌아갔다.
이와 같은 과정 속에서 일본의 조야에서는 정한론이 세차게 일고, 1873년에는 이것이 정치문제화하여 삿슈[薩州] 군벌의 거두이자 메이지[明治] 신정부의 참의(參議)인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 및 이다가키 다이스케[板垣退助], 외무경(外務卿) 소에지마 다네오미[副島種臣] 등 강경정한론자들은 우대신(右大臣) 이와쿠라 도모미[岩倉具視] 등이 해외시찰차 나가 있는 사이에 사이고가 스스로 견한대사(遣韓大使)가 되어 외교적 타결을 시도하고, 여의치 않으면 조선에 파병하여 무력행사를 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9월에 귀국한 이와쿠라 등 많은 각료들은 국력(國力)의 배양(培養), 내치(內治)의 선결을 들어 정한론에 반대하여 1개월여를 두고 논쟁을 계속하였다.
참고 자료
강동진, 일본근대사, 한길사
한배호, 명치체제와 근대화, 한길사
박영재, 오늘의 일본을 해부한다, 한길사
백태현, 근대일본의 대한침략론의 형성과정, 연세대학교 교육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