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학]修山 李種徽의 역사인식
- 최초 등록일
- 2006.02.22
- 최종 저작일
- 20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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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修山 李種徽의 역사인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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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문내용
이종휘의 저술 중에서 가장 큰 비중을 갖는 것은 한국사에 관한 서술이고, 그가 뒷날 이름을 남기게 된 것도 전적으로 그의 사론에 연유한다. 《修山集》의 권 11~권 14에 이르는 부분은 전적으로 한국사에 관한 서술로 채워져 있다. 권 11~ 권 13은 《東史》라는 제목으로 本紀 ․ 世家 ․ 列傳 ․ 年表 ․ 表 ․ 志의 순으로 한국사를 정리한 것인데, 서술시기는 고대와 고려까지를 대상으로 하였다. 다만, 고려시대는 志에서만 취급하여, 전체적으로 볼 때에는 《東史》의 주된 서술대상은 고대사라고 할 수 있다.
이종휘의 역사에 관한 논설들은 하나의 일관된 체계하에 쓰여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史書로서의 格式이나 體裁를 가지고 말한다면 매우 불완전하고 미숙한 것이 사실이다. 또한 자료를 엄밀하게 선별․인용하는 고증적 태도가 없이 결론만을 내세우고 있는 것도 또 한 가지 특색으로서, 그의 역사서술이 史書라기보다는 史論的 성격이 강한 것도 여기에 이유가 있다.
그의 역사인식의 성격을 검토하기에 앞서 또 한 가지 고려해야 될 것은, 〈靑丘古史敍〉와 《東史》의 내용상 不一致가 발견된다는 점이다. 즉 〈靑丘古史敍〉에서는 단군에서 신라까지의 역사를 서술하되, 7本紀 ․ 9世家 ․ 49列傳 ․ 10志 ․ 8表로 이루어졌다고 되어 있는데, 실제 《東史》는 4本紀 ․ 4世家 ․ 7列傳 ․ 3年表 ․ 3表 ․ 9志로 되어 있다. 따라서 《東史》는 〈靑丘古史敍〉에서 밝힌 내용보다 다소 축소된 것을 알 수 있는데, 특히 7本紀가 4本紀로 된 것은, 《東史》에서 三國本紀를 취급하지 않은 까닭으로 보인다. 다음에, 9世家가 4世家로 바뀐 것은, 世家로 취급하려던 濊貊 ․ 沃沮 ․ 沸流 ․ 樂浪 등을 列傳으로 바꾼 데 원인이 있는 듯하다.
따라서 이러한 몇 가지 점에서 양자 사이에 차이가 보이긴 하지만, 한국사를 기전체로 서술하려는 원칙에는 변함이 없고, 특히 本紀 ․ 世家 ․ 列傳의 형식을 따른 것은 특별한 주목을 요한다. 왜냐하면 한국사에다 本紀라는 용어를 쓴 것은 《三國史記》가 최초였지만, 거기에는 世家가 빠져 있고, 조선시대 史書에서는 《高麗史》와 許穆의 《東史》가 世家와 列傳의 형식만을 따랐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한국사 서술에서 本紀 ․ 世家 ․ 列傳의 형식을 완전히 갖춘 것은 이종휘의 서술이 최초라 할 수 있다. 이는 그가 사마천의 《史記》 형식을 굴절시킴이 없이 한국사에 적용함으로써 한국사의 권위를 격상시키려는 의도를 보여 주는 것이고, 또 그가 항상 《史記》와 《漢書》를 良史 라고 칭송하는 이유를 반영하는 것이다.
이종휘는 역사와 경학을 경위관계로 인식하여 「史與經 相爲經緯」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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