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사]한국의 기생과 일본의 게이샤
- 최초 등록일
- 2005.11.09
- 최종 저작일
- 2005.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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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개글
한국의 기생과 일본의 게이샤에 대해 비교한 보고서입니다. 아무쪼록 많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목차
1. 서 론
2. 본 론
1) 한국의 기생
2) 일본의 게이샤
3. 결 론
본문내용
기생의 유래에 대한 정설은 없으나 고대 부족사회의 무녀(巫女)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일반적이다. 즉 제정일치 사회에서의 사제(司祭)였던 무녀가 제정이 분리되어 국가가 성립되는 과정에서 지방 세력가와 결합하여 기생과 비슷한 신분을 형성하였다는 견해이다. 한편 <후한서(後漢書)>와 <수서(隋書)>에는 고구려의 유녀(遊女)에 대한 기록이 보이는데, 이들은 고대국가가 다른 부족을 정벌하는 과정에서 생겨난 피정복 부족의 부녀자들로, 국가 체제가 확립되면서 이른바 관기(官妓)와 같은 제도가 서서히 이루어진 것으로 짐작된다. 따라서 기생은 기본적으로 노비와 같은 신분이었고 이들이 일반 노비와 뚜렷한 계층을 이룬 것은 중앙 집권이 정착한 고려 때부터이다. 고려의 교방(敎坊)은 제도화된 기생을 배출하는 학교였으며 조선 시대에도 그대로 이어졌다. 한편 조선 중기 이후에는 사대부의 유교 문화와 융합하여 독특한 기생(기류) 문화를 낳기도 했는데 황진이(黃眞伊) 이매창(李梅窓) 등은 시조시인으로 문명을 날렸으며. 문학성이 뛰어난 고려가요도 기생층이 향유, 전승한 것으로 짐작되고 있어 이들이 한국 문학에 끼친 영향은 매우 크다.
그러나 조선 말기에 오면 기생이 일패(一牌), 이패, 삼패 등으로 분화되는데, 일패는 관기의 총칭으로서 한국 전통 가무의 보존 전승자로 뛰어난 예술인들이었으며, 이패는 밀매음(密賣淫), 삼패는 공창(公娼)의 기능을 했다.
한편, 일제 강점기에는 조선 말기의 기생 학교, 기생조합 등이 전국적인 규모로 확대되었으며 이를 통하여 사회적으로 비중 있는 역할을 하기도 했다. 진주(晉州)기생 산홍(山紅) 같은 이는 <기생 줄 돈이 있으면 나라를 위해 피 흘리는 젊은이에게 주라>고 친일파 인사를 꾸짖어 논개(論介)로 대표되는 의기(義妓)의 맥을 이었으며, 1919년 3.1운동 때는 진주 수원(水原) 해주(海州) 통영(統營)등지의 기생 조합원들이 궐기하여 만세 시위를 크게 벌였고, 이에 용기를 얻어 참여한 민중을 선두에서 주도하기도 했다. 한편 1907년의 한성기생조합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생겨났던 조합은 일제 강점기에 들어오면서 권번(卷番)이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으며 광복 후 이것이 폐지되어 제도적인 기생은 사라졌다.
참고 자료
없음